지도자 독단 아닌 폭넓은 의견 수렴 필요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오랜만에 펼쳐 들었다. 모두 54권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책은 제8권이다. 천하의 패권을 눈앞에 둔 항우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반대로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유방이 승기를 잡는 장면이 담겨 있다.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일까. ‘치평요람’ 편찬자들은 그 까닭을 이렇게 적었다. “항우가 마침내 천하를 잃고 한 고조 유방에게 패한 것은, 용감하고 강건하였으나 겁낼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 유방은 용감할(能勇) 뿐 아니라 겁낼 줄도(能怯) 알았다.”
‘능히 용감하고, 능히 겁낼 줄 안다(能勇能怯)’는 말은 세종의 표현으로 바꾸면 ‘가희유구(可喜有懼)’이다. ‘기뻐할 만하지만 두려움도 있다’는 이 말은 1433년(세종 15년) 4월, 최윤덕 장군이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 정벌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들은 직후 세종이 한 말이다. “다행히 크게 승리하였으니 진실로 기쁘다. 그러나 또한 두렵기도 하다. 지금은 비록 성공했지만, 이 공을 오래 지켜 후환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종이 말한 ‘두려운 마음(懼)’이다. ‘구(懼)’라는 한자는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 마음(?)’을 뜻한다. 어미 새가 포식자나 날씨의 변화를 살피며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이다. 세종은 파저강 정벌과 그 뒤로 8년간 이어진 북방 영토개척에서 그런 마음을 지녔다. 눈앞의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측해 철저히 대비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 확장은 바로 그 결과였다. 세종에게 ‘두려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준비와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유방이 장량, 소하, 진평 등에게 널리 묻고 온갖 가능성을 따져 대비했듯이, 세종도 황희와 허조와 김종서의 의견을 구하고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조사하게 했다. 전쟁 이후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대책을 세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하느냐는 점이다. 지도자는 머릿속 생각을 실제 일과 사물로 옮겨야 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그 실천의 핵심은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번 ‘치평요람’을 읽으며 특히 눈길을 끈 인물은 진평이다. 진평은 본래 고기 자르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항우를 찾아가 섬겼는데, 작은 공을 세운 뒤 벼슬과 금을 받았다가 곧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몸만 빠져나와 유방의 진영으로 갔다.
항우와 달리 유방은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진평을 후대했다. 그 비난의 내용은 항우를 배반했고 형수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유방이 진평을 추천한 위무지를 나무라자 위무지는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며, 왕께서 문제 삼으시는 점은 그의 행실입니다. 지금 항우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대왕께서 어느 겨를에 행실까지 갖춘 사람만을 쓰시겠습니까?” 이후 진평은 유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종리매, 범증 등 뛰어난 책사들을 항우에게서 떼어내는 공을 세웠다.
결국 인재를 어떻게 쓰느냐가 비극적 최후와 최종 승자를 가르는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치평요람’ 편찬자들이 마지막에 강조한 구절은 깊은 울림을 준다. “유방은 여러 사람의 온갖 계책을 모두 활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힘을 쏟게 하였으나, 항우는 다른 사람의 계책을 싫어하여 스스로 그 힘을 다 허비하였다. 남의 계책을 다 쓰는 자는 이기고 자신의 힘만 쓰는 자는 진다.”
새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가 70%에 달한다는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과다. 세종처럼 온 마음을 다해 인재를 고르고 발탁한다면, 사람들은 모든 힘을 쏟아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정부 인선이 마무리되는 7월쯤, 이재명 대통령의 향후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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