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당시 27번 친서·3차례 정상 회담
김정은 ‘하노이 노딜 트라우마’ 남은듯
美 구애에도 신중한 태도 유지 가능성
러·우 전쟁 종전 땐 다시 대화 나설 듯
트럼프, 北을 ‘뉴클리어 파워’로 설명
北 비핵화 아닌 관리형으로 전환 우려
韓, 비핵화 목표 맞춘 외교 쉽지 않아
韓·美동맹 훼손 없는 중장기 대책 절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2기 출범 이후 4개월여 만에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 대화를 재개하려고 시도한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져 향후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한국도 북한에 매파적 입장을 취했던 보수 정부가 물러나고 이재명정부가 들어서 변화를 맞은 시점이지만 남북관계의 변화로 향후 북·미 사이에서 외교적 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11일(현지시간) 백악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 교환 시도를 부인하지 않고 ‘싱가포르(1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에서의 진전’을 언급한 것은 북·미 대화 재개에 대한 뚜렷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기 당시 싱가포르, 하노이, 판문점에서 세 차례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총 27번의 친서를 교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전후 꾸준히 김 위원장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다만 현재로선 집권 1기와 달리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원할 유인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무기, 병력 양면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전략적 동반자’로서의 북·러 관계를 공고히 했다. 또 2019년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5개의 제재 해제를 받아내려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오래된 영변 핵시설 폐기에서 더 나아간 조치를 요구함에 따라 ‘노딜’로 끝난 것이 김 위원장에게는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북한이 이번 친서 수령을 거부한 것도 이 같은 상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북한이 대가로 원하는 수준이 당시의 5개 제재 해제보다 훨씬 더 올라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분간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계속되는 ‘구애’에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북한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를 재개할 필요를 느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비핵화 이전에도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이례적인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있을 3년 반 남짓한 시간을 북한으로서도 어떻게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번에는 북·미 간 대화 의제가 전격적인 비핵화가 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1기와 달리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뉴클리어 파워’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점, 트럼프 대통령 주변 인사들로부터 북한 비핵화가 사실상 쉽지 않다는 언급이 나오고 있는 점에 비춰 북·미가 대화를 재개하더라도 북핵과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가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처럼 엄격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우리 정부로서는 비핵화 목표에 맞춘 북핵 외교 공간을 열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북·미 대화가 깜짝 성사될 경우 한·미동맹에만 의존해 북·미 대화 진전 과정에서 소외(패싱)를 피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문재인정부 당시에는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등을 초대해 대화의 물꼬를 열었고, 북한과 대화의 끈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 만남 등 중재 외교를 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대화에서 철저히 배척하는 상황이다. 한·미동맹은 계속되지만 트럼프 행정부 하의 미국이 세세하게 모든 것을 한국과 공유하려 할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미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현재의 정세로선 한국이 역할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 관계보다 양자 관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김 위원장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도 마찬가지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센터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친서를 거절한 걸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줄 선물이 없는 것 같다”면서도 “한국은 어떤 경우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 접촉을 시도할 경우 사전, 사후 브리핑 등으로 긴밀히 협의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종현학술원이 북·미 정상회담 7주년을 맞아 이날 발간한 정책 제언서에서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행동 대 행동’ 방식의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합의를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며 “북·미 협상 재개에 대비해 한국은 중장기 로드맵을 갖춰야 하며 어떤 방식의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한·미동맹이 훼손되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 조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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