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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끓이다 화재로 숨진 80대… 이름 알려줬지만 “신원미상” 답변뿐 [심층기획-‘등본에 없는 마을’ 못 떠나는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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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11 06:00:00 수정 : 2025-06-11 20: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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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 말소… 복지혜택 못 받아
집주인 “밤에는 추워 못 견딜 정도
방세 대신 연탄비 보태라 했는데…”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콘크리트 바닥 위로 화장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불과 넉 달 전 화재로 목숨을 잃은 주진호(가명)씨가 살던 곳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의 한 언덕,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엔 근처 세 가구가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 들어섰다. 그날의 유일한 흔적은 공터 한편에 세워진 연탄창고. 안에는 주씨가 생전에 사용했던 연탄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10일 경찰 등에 따르면 주씨는 지난 2월11일 이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졌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주변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화재 원인은 부탄가스 폭발로 추정된다. 주씨가 휴대용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다가 부탄가스가 폭발했고, 이것이 근처 휴지 등에 옮겨붙으며 불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지난 2월11일 발생한 화재로 가건물이 불에 탄 자리에는 공용화장실이 세워졌다. 변세현 기자

당시 취재진이 찾은 화재 현장에서도 부탄가스가 장착된 휴대용 가스버너와 철제 커피포트 등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조립식 샌드위치 패널과 목재로 지어진 가건물이라는 점도 화재를 키운 원인으로 꼽힌다.

 

주씨가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건 2019년 12월쯤이다. 인근 교회의 한 목사가 내부순환고가도로 밑에서 노숙하던 주씨를 발견해 데려왔다. 목사는 가건물을 가지고 있던 황선여(90)씨에게 건물을 빌려 달라 부탁했고, 사정을 딱히 여긴 황씨가 주씨에게 세를 주기로 했다. 월세는 13만원. 다만 이마저도 첫 달에 한 번 받곤 이후로는 비용 없이 지냈다.

 

황씨는 “집이 너무 열악해 밤에는 추워서 못 견딜 정도였다”며 “방세는 그만 내고, 그 돈으로 연탄을 사서 난방에 보태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황씨의 배려로 주씨는 허름한 가건물에서 6번의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주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두고는 증언이 엇갈린다. 바로 근처에서 살던 주민들은 주씨가 매일 막걸리를 마시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촛대 같았다고. 평소 잘 씻지 않아 주씨를 피해 다녔다는 주민도 있었다. 다만 주씨를 오랫동안 돌봐온 목사의 말은 달랐다. 목사는 “말도 함부로 안 하고, 총기가 있는 사람이었다”며 “특히 신문 읽는 것을 좋아해 주위에서 신문을 자주 구해드렸다”고 설명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주씨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었다. 주씨를 돌보던 목사는 “나라의 도움을 좀 받고자 신분을 회복하려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며 “스스로 등록해도 혜택을 받지 못할 거라고 했다”고 말했다. 구청 관계자도 “주민센터로 와서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없다고 안다”며 “보통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도움을 받으려 하는데, 이번은 특이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주씨는 동네 사람에게도 본인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계좌도 휴대전화도 없던 그를 보며 동네 사람들은 “간첩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 있느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주씨에게 문제가 생긴 건 지난해 12월. 거동에 문제가 없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목사는 “작년까지만 해도 거동에 문제도 없었고 치매 끼도 없었는데, 12월부터 갑자기 못 걷기 시작했다”며 “차에 타기도 어렵고, 앉으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근처에 사는 노은돌(58)씨는 “새벽에 주씨가 눈밭에 누워 신음을 내는 걸 보고 일으켜 줬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니 또 넘어져 있더라”고 말했다.

 

주씨가 누워있던 한 달 동안, 바로 옆에 살던 황씨가 주씨의 끼니를 챙겼다. 화재가 벌어졌던 당일도 황씨는 주씨를 위해 찬밥을 챙겨 갔다. 황씨가 문턱에 앉아 주위를 청소하고 있던 동안, 주씨는 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려고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였다. 그때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부탄가스가 폭발했고, 근처에 쌓아둔 휴지에 불이 붙으며 화재가 급격하게 커졌다. 문에 있던 황 씨도 머리 부분에 화상을 입었다.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60대 김모씨는 “할머니 한 분이 불이 났다며 바가지를 들고 뛰어들어왔다”며 “119에 신고하는 동안 불이 순식간에 다 붙어버렸다. 소방차가 도착할 때까지 10분 정도 걸렸는데, 이미 저 사람은 죽었겠구나 생각할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화재 신고가 들어온 건 그 날 오후 2시29분. 소방이 차량 15대와 인력 50명을 투입해 30분 만에 초진을 완료했지만, 주씨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에 탄 이후였다. 신원 확인을 위한 지문 채취가 어려웠을 정도였다.

 

5년 동안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던 그는 사고가 나기 며칠 전 목사에게 자신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밝혔다. 1944년 8월 3일생 주진호. 그는 언젠가는 다 얘기해 주겠다며 3월까지는 다 정리하겠다고 덧붙였다. “3월 전에는 뭐가 나오겠다 생각했는데, 그 전에 돌아가셨으니….” 화재 발생 당일 목사는 전해 들은 그의 이름을 알려줬지만, 소방에서는 “신원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답을 받았을 뿐이다.

 

주씨는 종종 목사에게 “미국에 있는 아들과 딸이 곧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만 주씨가 살아있을 때 가족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목사가 “가족에게 소식이 왔냐”고 물어도 주씨는 “이번엔 안 될 거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가 정말 미국에 아들과 딸이 있었는지 주민들은 알 길이 없어졌다. 취재진은 서대문구청에 주진호 씨의 신원 및 무연고 장례 진행 여부를 문의했으나 확인해줄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화재가 발생한 지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멀끔히 흔적이 지워진 현장 근처에서 이태순(74)씨와 황씨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요즘은 어디가 아픈지 시시콜콜 얘기하던 이씨는 주씨 얘기가 나오자 짐짓 역정을 냈다. “남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고. 잘 죽었지.” 그 옆에서 대화를 듣던 황씨도 “지가 불 지르고 지가 죽었다”며 혀를 찼다.

 

모진 말과는 달리, 개미마을의 주민들은 계속 주씨를 돌봐왔다. 근처에서 공짜로 연탄을 주기도 하고, 때론 머리를 자르라고 이발비를 쥐여주기도 했다. “그 영감이 복은 그래도 있었어. 주위 사람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지.”


변세현·장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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