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기약 없이 기다리는 ‘올리버’
옆집 헬퍼봇 ‘클레어’와 사랑 빠져
부품 없어 인간과 같은 유한한 삶
사랑으로 풍요로워지는 모습 그려
윌 애런슨·박천휴, 대학원 때 만나
‘번지점프를 하다’로 첫 공동작업
창작뮤지컬 ‘일 테노레’도 큰 인기
대학로 작은 소극장에서 태어난 헬퍼봇(사람을 돕는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9일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 뉴욕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았다. 토니상 주요 6개 부문을 석권한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글지글한 잡음이 정겨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번스의 재즈 레코드 소리가 흘러나오는 작은 아파트에 사는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 이야기다.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춤도 없다. 다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 로봇이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어떻게 유한(有限)한 삶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드라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어떤 작품
친구처럼 여겼던 주인 제임스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올리버는 작은 화분을 기르며 재즈 월간지와 수리용 부품을 배달해주는 우편배달부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게 유일한 일상이다. 결국 로봇보다 먼저 늙어버린 우편부는 “더는 너를 위한 부품은 생산되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이조차 올리버에겐 큰 근심거리가 아니다. 노인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로봇도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마지막에 미련이 없다. 그런데 옆집 헬퍼봇 클레어가 갑자기 올리버 일상에 들어온다. 역시 버려진 고물 로봇 신세인데 충전기를 빌리기 위해서다. 숫기 없는 올리버는 낯선 존재의 등장에 당황하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그녀와 만남을 기다리게 된다.
이 작품은 예술창작 지원에 지속적으로 과감한 투자를 해온 우란문화재단 기획으로 태어났다. 2016년 국내 초연 후 인기에 힘입어 여러 차례 재공연하면서 뮤지컬 명커플 ‘전미도 클레어·정문성 올리버’를 배출했다.

우란문화재단은 초기부터 해외 진출을 지원했는데 2016년 미국 뉴욕에서 낭독회 형식으로 열린 ‘어쩌면 해피엔딩’ 쇼케이스를 본 브로드웨이 제작자 제프리 리처즈가 미국 진출을 견인했다. 토니상을 여덟 번이나 받은 명제작자를 만난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해 11월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개막했다. 이후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큰 호평을 받으며 한국 공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쓰게 됐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 중인 토니상 수상 프로듀서 레이철 서스먼은 “‘어쩌면 해피엔딩’은 특유의 따뜻한 이야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다”며 “이 작품이 한국 뮤지컬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것”이라고 내다봤다. ‘K-뮤지컬국제마켓’ 참여차 방한 중인 서스먼은 “초반에 수익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관람객들이 주변에 적극적으로 공연을 알리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며 “공연이 진행될수록 관객들 사이에서 진심을 담은 후기가 입소문으로 이어져 성공을 거뒀다”고 설명했다.
박병성 공연평론가는 “내용상으로 보면 브로드웨이에서 찾아보기 힘든 소재다. 브로드웨이는 기존 책이나 음악, 역사 등 IP(지식재산권)가 있는 작품을 주로 다룬다. 규모도 보통 큰 공연이 많다”며 “‘어쩌면 해피엔딩’은 소박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휴머니즘을 전달했다. 한국을 배경 삼은 신선함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 창작진 된 ‘윌·휴’ 콤비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든 윌 애런슨(작곡)과 박천휴(작사)는 수년 전부터 국내 공연계에서 ‘윌·휴’로 불리며 주목받은 창작 콤비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2012)로 주목받은 두 사람은 ‘어쩌면 해피엔딩’(2016)으로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윌·휴 콤비가 2023년 선보인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최초의 테너 이인선의 삶을 극화한 이 작품도 뛰어난 작품성과 함께 흥행에 성공했다.
2008년 미국 뉴욕대학원에서 시각예술을 공부하던 박천휴는 같은 대학원에서 뮤지컬 음악을 공부하던 애런슨을 만났다. 이후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작곡을 애런슨이 맡게 되며 박천휴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창작 과정에 대해 박천휴는 언론 인터뷰에서 직장인이던 시절 퇴근 후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귀가하는 사람들을 로봇에 비유한 노래를 듣다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로봇을 주인공으로 해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생각해서 바로 애런슨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아이디어를 공유했다고 한다.
박천휴는 토니상 수상식 직후 ‘어쩌면 해피엔딩’ 국내 공연 기획사인 NHN링크를 통해 “정말 많은 분이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 점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놀랍게도 한국과 뉴욕 관객의 반응이 매우 비슷하다. 이 작품이 가진 감정이 보편적으로 닿는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애런슨도 “믿기지 않을 만큼 벅차고 감격스럽다. 너무 흥분해서 한국말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국어로 “정말 믿을 수 없다”고 소감을 말했다. 박천휴는 “이 작품이 한국에서 첫 트라이아웃(시연)을 시작한 지 정확히 10년이 됐다”며 “당시부터 지금까지 지지해준 한국 관객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국 팬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는 “‘고스트 베이커(2024 한국 초연)’의 영어 공연화를 위해 작업 중이고, 새로운 이야기들도 준비하고 있다”며 브로드웨이 후속작 공연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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