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이션 촬영 탄소 배출 막대
‘지속 가능한 제작’ 위해 컨설팅
소품 기부 돕고 에너지 절약 자문
“한국도 일단 시작하고 실천을”
“영화를 만드는 건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끔찍한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20여년 전, 영화제작 과정의 환경 파괴 요소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에 충격 받아 ‘지속가능한 영화 만들기’ 실천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영화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해 지금은 친환경적 영화 제작 문화 정착을 위해 발로 뛰는 영화인들이 지난 5일 개막한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세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영국 출신 폴 에번스와 독일 출신 볼커 랭호프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폴 에번스는 영국 영상업계에서 25년 넘게 감독·작가로 활동하다 산업 내 환경 불감증에 위기감을 느끼고 2009년에 ‘그린슛’을 공동 설립했다. 그린슛은 영화·TV 등 영상 산업에서 지속 가능한 제작 관행을 촉진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독일 영상산업에서 지속 가능한 제작 관행을 촉진하는 전문가 네트워크 BVGCD(미디어-모션픽처스 그린컨설턴트 연합) 소속 감독 볼커 랭호프는 환경 인식개선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세계 각국에서 지속 가능한 제작 관련 교육과 자문을 맡고 있다. 2017년부터 2년간 서울예대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존 제작 관행대로라면 영화 산업이 엄청난 환경 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차량과 항공기로 스태프와 장비, 세트를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며, 특히 로케이션 촬영 때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은 재앙 수준이다. 디젤 발전기는 온실가스와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하며, 세트 제작과 폐기 때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양산한다. 미국프로듀서조합(PGA)에 따르면 할리우드 대형 텐트폴 영화 제작 때 최대 3370t의 탄소를 배출한다. 일반 가정 656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하는 전력량과 맞먹는다.
이들은 환경을 위해 영화 제작을 중단할 수 없지만, 실현 가능한 실천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폴 에번스가 속한 그린슛은 실제 영화 제작 현장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폐기물을 재활용할 방법을 컨설팅하고, 제작 후 남은 의류·소품·음식을 폐기하는 대신 기부하도록 돕는다. 그린슛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 영화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 등 2500편 작품에 참여했다. 에번스는 “영화 촬영 세트와 의상 등 대부분이 일회용으로 소모된다”며 “풍족한 자원을 지닌 산업에서 일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경각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린슛은 ‘그린 스튜어드’(Green Steward)를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산업에 진입하고자 하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제작 방법을 교육한다. 또 이들을 제작 현장에 배치해 환경 파괴를 줄이기 위한 조력자이자 감시자로 일하게 한다.
독일에는 이와 비슷한 개념의 ‘그린 컨설턴트’가 촬영 현장을 누빈다. 영화 제작 전반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종합적 조언을 건네는 이들이다. 랭호프는 “촬영장 세트를 재활용할 방법이나 친환경적 소재를 쓸 방법부터 친환경적 발전기를 사용하기 위한 방법, 해외 로케이션을 로컬(국내) 촬영으로 대체할 방법 등 다방면의 환경 친화적 제안을 건네는 게 그린 컨설턴트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도 이를 위해 각종 유인책을 제공한다. 랭호프는 “영화 촬영 때 그린 컨설턴트를 고용하지 않으면 각종 재정지원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며, 동시에 그린 컨설턴트를 고용해 실질적인 탄소·폐기물 감축 절감이 확인될 경우 추가 펀딩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친환경 제작에 대한 인식이 걸음마 단계인 한국 영화계를 위한 조언을 청해 들었다.
“영국에선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이 친환경적 제작에 대한 인식 확대를 위한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TV 채널과 스트리밍 플랫폼 등 미디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체들이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돈이 제일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프로덕션을 펀딩하는 사람,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실천을 이끄는 게 중요하고 가장 빠른 길입니다.”(에번스)
“한국은 톱다운(Top-down) 사회지요.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생각을 바꾼다면 변화도 빠르게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제일 중요한 건 그냥 하는 것(Just do)입니다. 일단 시작하고, 계속해서 실천하세요.”(랭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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