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화강석 입히고 ‘궁궐 우물천장’처럼 디자인… 절묘한 동서양의 美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관련이슈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입력 : 2025-06-04 06:00:00 수정 : 2025-06-03 18:51:23

인쇄 메일 url 공유 - +

(61) ‘스치는 공간의 재발견’ 3호선 경복궁역

김수근·류춘수 ‘의기투합’
그리스·로마 건축 적용된
덕수궁의 ‘석조전’서 영감
전통건축, 현대적 재해석

불로문·토수 등 곳곳 설치
석등엔 조명대신 시계 넣어
6개월 걸쳐 설계원형 복원
가려졌던 58개 아치 드러나

매일 많은 사람이 지하철역을 이용한다. 하지만 대부분 역이름으로 기억할 뿐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타일로 마감된 벽과 스테인리스 난간, 화강석 바닥과 그 사이에 노란색 플라스틱 점자 블록이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몇 지하철역은 특색 있는 공간을 품고 있다. 녹사평역(6호선)의 자연채광돔, 충무로역(3호선)의 인공암반, 이대역(2호선)의 길이 40m가 넘는 에스컬레이터가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가장 전통적인 공간인 경복궁과 서촌으로 연결되는 경복궁역도 인상적인 지하철역 중 하나다.

 

우리나라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과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가 함께 설계한 경복궁역은 한국전통건축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공공간으로 평가된다. 특히, 상설 전시 공간으로 조성됐던 지하 1층의 천장은 목조건축의 우물천장을 떠오르게 한다.

도시기반시설 중 교통시설에 속하는 지하철역은 일반적으로 토목엔지니어링 회사가 설계한다. 하지만 경복궁역만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건축가, 김수근이 설계를 맡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비록 많은 왕이 머물지 않았음에도 조선시대 정궁(正宮)이었던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김수근이 1981년 설계에 나선 경복궁역은 4년이 지난 1985년 10월 개통됐다. 당시 김수근이 이끌었던 공간건축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각 프로젝트 담당자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경복궁역은 1986년까지 공간건축에 몸담았던 건축가 류춘수(이공건축)가 주도했는데, 그는 나중에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설계했다.

김수근과 류춘수는 한국전통건축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문제는 경복궁을 포함해 그들이 재해석해야 하는 대상은 석조건축보다 목조건축이 더 발전했던 조선시대 건축이었다.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包) 구조나 건물 내부에서 기둥과 보를 나무로 정교하게 짜맞추는 기법이 이때 발전했다. 반면, 석조건축은 석굴암과 불국사를 만든 통일신라시대가 전성기였다.

 

올해 9월 메트로미술관이 폐관되면서 하얀색 전시 벽 뒤에 있던 58개의 아치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수근과 류춘수는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 있는 ‘석조전(石造殿)’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석조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당시 재정고문이었던 존 맥리비 브라운의 건의로 새로운 국가를 상징하는 궁궐로 지어졌다. 설계는 당시 중국 해관 소속이었던 존 레지날드 하딩이 맡았는데, 그는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원류로 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적용했다. 유럽의 궁전과 워싱턴DC의 주요 건축물에도 이 양식이 쓰였다.

경복궁역에서 건축의 고전적인 미학을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상설 전시 공간으로 조성된 지하 1층이다. 특히, 지하 1층의 천장 디자인은 궁궐이나 사찰 같이 목구조로 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우물천장을 떠오르게 한다. 구조적으로는 기둥 없이 넓은 공간을 만들 때 주로 쓰이는 와플 플랫 슬래브 방식으로 지어 지하 1층에는 기둥과 보가 없다. 건축가는 아치형 구조가 최대한 돋보이도록 움푹 들어간 부분에 조명을 매립했는데, 양쪽 벽에 설치된 조명도 구조체 안쪽으로 집어넣어 연속된 넓은 아치를 강조했다.

지하 1층의 천장 디자인과 양쪽 벽의 아치가 건축의 고전적인 미학을 느끼게 하는 건 맞지만 ‘한국 전통’ 건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석조건축만의 뚜렷한 특징이 있었던 게 아니고 디자인 아이디어도 서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복궁역이 개통했을 당시 역이름은 경복궁역이 아닌 ‘중앙청역’이었다. 중앙청은 1926년 일제가 조선의 식민 통치를 위해 경복궁을 훼손하고 지은 건물로 1995년 철거됐다. 창신동 돌산에서 채석한 화강석을 이용해 절충형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중앙청은 역사 개통 이듬해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다. 역이름이 경복궁역으로 바뀐 건 1987년 5월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복궁역의 석조 구조물은 조선시대 건축 미학보다 중앙청 건물과 더 쉽게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경복궁역의 석조 구조와 전통 건축 간의 관계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역 내부 곳곳에는 불로문, 석등, 토수(吐首)와 같은 전통적 요소들이 설치돼 있다. 특히, 토수는 보통 처마나 지붕의 추녀마루 끝에 설치되어 빗물을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건물 안에는 설치하지 않는다. 그 외 눈에 띄는 건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석등이다. 석등에서 불을 밝히는 부분은 화사석(火舍石)인데 경복궁역 내 석등에는 조명이 아닌 시계가 설치돼 있다. 시계는 철도와 함께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우리나라에 기계식 시계가 최초로 설치된 곳도 경복궁 경내였다. 석등에 설치된 시계가 이런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경복궁역은 작년 2월부터 6개월간 복원 공사를 거쳤다. 공사를 담당했던 서울교통공사는 지하 1층에 있던 메트로미술관을 폐관하면서 김수근이 설계했던 원형으로 복원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9월에 재개관한 경복궁역에서는 천장의 노송군락도, 봉황도와 그동안 하얀색 전시 벽에 가려져 있던 58개의 아치를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설계자들이 지하 1층 바닥에 만들어 놓은 개구부는 여전히 막혀 있다는 점이다. 개구부는 지하 2층에서 올라오는 가운데 계단 뒤쪽과 지하 1층 양쪽 벽을 따라 몇 군데에 있는데 현재는 불투명한 유리로 덮여있다. 아마도 설계자들은 개구부를 통해 두 개 층이 시각적으로 연결되고, 지하 1층 상설 전시 공간의 조명이 지하 2층까지 은은하게 떨어지며, 벽에 걸린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 같다. 동시에 개구부를 둘러싼 철제 난간은 김수근이 1980년대 들어 고민했던 하이테크한 기술의 이미지가 조형적으로 반영된 건축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 평균 3만명 넘는 사람이 이용하는 지하철역 통로 바닥에, 비록 난간이 설치돼 있더라도 군데군데 뚫린 개구부는 위험 요소이기는 하다.

경복궁역을 둘러본 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역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봤다. 솔직히 얘기하면 평범한 재료로 채워진 익숙한 공간이 그렇게 극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이가 지하철을 이용해 어딘가로 이동하는 장면을 보며, 지하철역이 단순히 기능적인 시설이 아니라 집을 나서 하루를 시작하고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의미가 담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상큼 발랄'
  • 박보영 '상큼 발랄'
  • 고윤정 '매력적인 미모'
  • 베이비돈크라이 이현 '인형 미모'
  • 올데이 프로젝트 애니 '눈부신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