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러진 책상·컵에 남은 물 자국
스쳐 지나갈 법한 사물·장면 응시
고유한 내력 지닌 ‘초상’에 가까워
익숙함서 감정의 잔상 마주하게 돼
팬트리 시리즈 등 30여점 선보여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28일까지
‘각 병마다 술을 비워낸 자리에는/ 누군가의 밤이 채워졌겠지…// 나는 지금/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다// 늘 늦은 친구를 기다리는 것/ 오늘도 늦을 걸 아는 친구를 기다리는 건/ 결국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밤.’

이토록 마시면서 비어가는 병 속에 시간들을 켜켜이 담아놓았구나. 전시장 한쪽 벽면을 독차지한 그림은 ‘발렌타인’, ‘로얄 살루트’, ‘시바스 리갈’, ‘발베니’, ‘조니 워커’, ‘글렌피딕’, ‘맥켈란’, ‘히비키’, ‘짐 빔’ 등 위스키나 버번을 캔버스 가득 품고 있다. 홀로 바에 앉아 두 잔을 마시고 조용히 떠나간 취객에게서 영감을 얻은 정수영의 작품 ‘Waiting for Nobody’(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다)다.
‘반신욕을 하다 땀이 살짝 맺힌 얼굴을 보니/ 왠지 좀 예뻐진 것 같다// 사진 한 번 찍어 본다// 피식// 꼴불견.’

공유할 순 없지만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포착했다. 반신욕하는 이의 기분 좋은 순간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Not for Posting’(게시하지 않습니다)이다.

어제까지 몽우리였던 꽃들이 오늘은 일제히 폈다. 바나나는 이미 점박이 문양을 드러내며 한껏 익어가고 있다. 작가는 영양제 먹는 걸 늘 까먹는다. 부랴부랴 루테인과 비타민, 마그네슘을 입에 털어 넣는다. 저마다 성장기나 전성기가 다르다. 작품 ‘각자의 생애주기’.
‘자주 들리는 화방 윗층은 꽃시장이다// 화방을 들릴 때면/ ‘꽃’ 사갈까? 말까?/ 그 작은 사치를 늘 망설인다// 누군가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할 땐/ 아낌없이 고르면서…// 그러다 고개를 숙였는데/ 신발이 너무 반짝였다// 그날은,/ 내 신발이 무척이나 반짝여서/ 그냥 꽃을 사왔다.’

작가는 이제 적어도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만큼은 결코 망설이지 말자고 되뇐다. 작품 ‘나에게’를 통해서다.
정수영의 작업은 쉽사리 지나치는 일상 속 순간들에서 출발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특정 사물과 만나 불현듯 형태를 갖추는 순간들이다. 바닥에 놓인 옷가지나 어질러진 책상, 컵에 남은 물 자국 등 스쳐 지나갈 법한 장면들이 작가의 동공을 차지한다. 때로는 타인의 일상에서 발견된 풍경이 개인적 기억의 층위와 포개지며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이에 대해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찾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눈에 밟히는 사물이나 장면을 따라가는 방식에 가깝다”며 “그렇게 대상을 좇다 보면 ‘왜 이것이 눈에 들어왔을까’라는 질문이 남고, 그 질문이 그림의 출발점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가 마주한 사물들은 그저 대상에 그치기를 거부한다. 그 안에는 시간이 스며 있고, 기억이 층층 쌓여 있다. 정서적 밀도가 응축된 사물은 단순한 오브제를 넘어 고유한 내력을 지닌 ‘초상’에 가까워진다. 정물화와 초상화의 경계 어디쯤 자리 잡는 것이다. 작가는 특별한 연출 없이 사물이 갖춘 분위기와 흔적을 존중하며,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추상적 감정이 구체적 사물과 만나는 순간에 주목한다. 관객들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을 들여다보면서도 감정의 잔상과 마주하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뭐든지 특별히 설레거나 신나지 않게 된 건// 생일도, 크리스마스 이브도/ 달력은 유난을 떨지만/ 내 하루는 여전히 평범하게 흐른다// 아주 잠깐씩 “아!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네.”/ 심장 주변이 쬐끔 쫄깃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냥 다시 어제와 같다// 나이가 들수록/ 호들갑스러운 마음들이 줄어드는 게/ 사실 나는 무척이나 좋다.’


크리스마스이브나 생일처럼 북적여야 하는 날…. 그러나 평상시처럼, 이제 작가가 크리스마스이브를 맞는 기분이란 ‘내리는 커피의 마지막 방울이 떨어지는 느낌’, 딱 그 정도일 뿐이란다. 작품 ‘아침, 크리스마스 이브’가 이런 정서를 오롯이 담고 있다.
정수영은 감정이 지나치게 눌리거나 지배되는 그림은 원하지 않는다. 사실에 가까운 재현을 통해 사물의 형태를 드러내면서도 과도한 서술을 지양하는 이유다. 조밀조밀 얘기하되 그걸 다 말하기는 겁나고, 그래서 극사실이 아닌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적절한 타협을 한다. 비워진 공간과 조형적 긴장을 통해 사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은근히 암시할 뿐이다. 그에게 사물은 삶의 작은 장면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정수영의 개인전이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에서 ‘I want to be invited, but I don’t want to attend’(초대받고 싶지만, 참석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문패를 내걸고 관객을 맞는다. 신작 ‘팬트리(Pantry)’ 시리즈 등 회화 30여점을 선보인다.
팬트리 시리즈는 개인의 내밀한 시간을 드러내면서, 그 안에 담긴 보편적 현실의 단면을 비춘다. 팬트리는 주방이나 생활 공간 속 작은 저장실을 말한다. 주로 빵과 식재료를 보관하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조미료, 통조림, 과자, 음료수, 주방 기구 등을 넣어두는 장소로 확장됐다. 무엇이, 어떻게 축적되어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 사람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까지 짐작하게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생활의 흔적이 농축된 장소로서, 단순한 수납공간을 넘어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불안을 비추는 상징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작가에게 팬트리는 삶의 방식과 취향, 가치관,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축적의 장소다. 은밀하지만 솔직한 사물들로 채워진 이곳은 타인의 삶을 엿보는 듯한 ‘관음’의 시선을 유발한다. 닫힌 공간 속 사물들을 드러냄으로써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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