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 상관없이 ‘좌향좌’ 심화
직선제 1987년 정당 불문 “민주화” 강조
IMF 거친 후 경제민주화·복지 화두로
팬데믹 직후 ‘현금성 복지공약’ 최고치
이번 대선 일제히 “기업 지원” 전면에
정당 색깔·후보 공약 서로 달랐다
대선 패배 후 재도전 주자들 ‘노선 전환’
DJ·이회창·문재인 보수·진보 넘나들어
이재명 ‘매우 진보적→진보적’ 우향우
“후보 간 정책공약 차별성 약해져 문제”
민주화 이후 실시된 제13대 대선부터 이번 21대 대선의 주요 후보 24명 중 16명(66.7%)의 공약이 진보 성향으로 나타났다. 보수 색채를 보인 후보(5명, 20.8%)보다 3배 이상 많았다. 중도 성향을 보인 후보는 3명(12.5%)에 그쳤다.

보수 성향의 후보들조차 진보 공약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지 확대’나 ‘교육 투자 확대’ 등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 정당이나 이념을 내세우는 대선후보들마저 대선 시기에 유권자들의 표심을 붙잡기 위한 ‘좌향좌’ 행진을 해왔다는 분석이다.
19일 세계일보가 한국정당학회와 제13대부터 20대 대선까지 15% 이상 득표한 대선후보 21명과 이번 21대 대선에서 여론조사 지지율 5% 이상 후보 3명의 10대 및 핵심 공약 217개의 이념적 색채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조사됐다.
이번 분석에서 활용한 도구는 전 세계 60개국 정당 공약을 분석해온 매니페스토 프로젝트가 개발한 ‘매니페스토 R’이다. 이 도구는 공약의 정치성향을 분석하는 ‘라일 지표(RILE, Right and Left Index)’를 활용해 정치성향을 점수로 나타낸다. 공약의 정치성향 점수가 음수면 진보, 양수면 보수 공약으로 판정한다.
◆시대적 상황 따라 후보의 공약 성향도 변해
민주화나 경제 성장 등 시대적 과제나 의제가 달라지면서 주요 대선후보들의 공약 성향도 변해왔다. 이 과정에서 각 후보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자신의 정당이나 진영과 성향이 다른 대선 공약을 약속하기도 했다.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모두 진영과 상관없이 강한 민주화 열기를 반영한 공약을 쏟아냈다. 보수 계열로 분류되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핵심 공약은 “성숙한 민주 한국의 건설”을 내세우는 등 진보 색채(-30점)를 보였다.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 역시 “국민 기본권 신장”을 내세우며 진보 색채(-10점)를 드러냈고, “민주 정치 질서의 확립”을 전면에 내세운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 역시 진보 성향(-30점)을 보였다. 세 후보 모두 공약의 정치성향 점수가 진보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며,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공약의 정치성향이 다소 넓게 분포한 가운데 주요 후보들이 소속 정당과 다른 성향의 공약을 내세웠다. 3당 통합으로 여당이 된 민주자유당의 후보가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은 진보 색채(-10점)를 보였다. 반면 야당이던 민주당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은 오히려 보수 색채(25점)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공약은 중도 성향(0점)을 보였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치러진 15대 대선에서는 경제 공약을 중심으로 정체성이 두드러졌다. 보수 진영의 이회창 전 국무총리(10점)는 “활력 있는 선진경제대국의 건설”과 같이 경제 성장 및 시장경제 활성화를 강조하며 당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전 대통령(-10점)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극복”과 함께 “참여·협력의 신노사관계 확립과 적극적인 고용안정대책의 수립”으로 노동권 강화를 강조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또다시 소속 정당이나 진영과 다른 성향의 공약을 내세웠다. 보수 성향의 이회창 전 총리는 “시민 생활 안정과 중산층 재건으로 희망을 되찾겠다”며 복지 공약을 내세우는 등 진보 색채(-20점)를 보였고, 진보 성향의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은 반대로 “잘사는 대한민국” 같이 경제 성장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 성향(25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두 당 후보의 이념적 색채가 전통적인 정체성과 다소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정당과 진영 관계없이 ‘복지 확대’로 수렴 현상
2007년 17대 대선부터 핵심 공약에서 후보들 간 이념 차이가 줄어들고 내용 역시 유사해지는 흐름이 나타났다. 특히 보수 후보들도 진보 성향의 복지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보수 정당으로 분류되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대통령(-30점)은 “서민 중심, 수요자 맞춤형으로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주거환경을 다양하게 개선하겠다”와 같은 진보적 색채가 짙은 복지 확대 공약을 제시했다. 진보 계열로 분류되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의원(-60점) 역시 “수도권 아파트를 2억원 이하(99㎡ 기준) 공급, 결혼·출산가정 주거 대책으로 내 집 마련 시기를 앞당기겠다” 등 유사한 복지 확대 공약을 내걸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가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복지 공약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 진영의 새누리당 박근혜 전 대통령 공약은 “한국형 복지체계의 구축”, “공정성을 높이는 경제민주화”를 동시에 내세우는 등 진보 색채(-20점)를 드러냈다.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복지국가와 성평등사회”와 함께 “상생·협력의 경제민주화”를 약속하며 진보 색채(-30점)가 뚜렷했다.
촛불 정국 이후 치러진 2017년 19대 대선에선 후보별 강조점은 달랐지만 일자리 창출과 복지 확대라는 공통 키워드가 있었다. 진보 진영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통령(-20점)은 노동권 강화 정책으로 분류된 “일자리를 책임지는 대한민국” 공약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고, “어르신이 행복한 9988 대한민국” 등 복지 확대 공약도 비중 있게 다뤘다. 보수 진영의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구시장(0점)은 “기업에 자유를, 서민에게 기회 제공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공약으로 전통적인 보수 색채를 드러내면서도 “서민 맞춤형 복지 지도 완성으로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같은 복지 공약도 강조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진행 중이던 2022년에 치러진 20대 대선에선 분석 대상 중 가장 진보 공약이 많았던 해로 기록됐다. 진보 계열의 민주당 이재명 후보(-70점)는 물론이고, 보수 계열의 국민의힘 윤석열 전 대통령조차 복지 확대를 공약하는 등 진보 색채(-40점)가 두드러졌다. 재난지원금 등 직접적인 현금성 지원과 전반적인 복지 확대 공약이 양 후보에게 공통으로 나타났다.

◆대선 패배 후엔 공약 이념 전환하는 후보들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하는 후보들은 이전 대선과 정반대 성향의 공약을 들고나오는 ‘이념·노선 전향 현상’도 두드러졌다. 보수 계열의 후보들은 진보 진영 후보들보다 비교적 공약 이념 점수 변동 폭이 작았다. 진보 진영은 평균 41.2점, 보수 진영은 평균 27.5점으로 매 대선 때마다 공약의 정치성향 좌표가 이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공약은 제13대 대선에서는 진보 색채가 강했지만(-30점), 14대 대선에서는 보수적으로 선회했다가(25점), 다시 15대 대선에선 조금 약한 진보 색채(-10점)로 돌아온 끝에 당선됐다.
보수 계열의 한나라당 총재를 지낸 이회창 전 총리의 핵심 공약들은 더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이 전 총리의 공약은 처음 대선에 출마한 15대 대선에선 보수 성향(10점)이었지만, 16대 대선에서 진보적으로 선회(-20점)했으며, 무소속으로 출마한 17대 대선 공약에선 다시 보수 색채(30점)로 돌아왔다.
재선에 도전한 진보 진영의 후보는 경제 공약 기조가 바뀌는 경우가 잦았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낙선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2017년 19대 대선에선 보수 색채(10점)로 이동했는데, 이는 경제 공약이 ‘시장 규제 강화’에서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로 전환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이번 21대 대선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역시 지난 20대 대선보다 우클릭한 10대 공약을 내세웠다. 이 후보의 지난 대선 공약의 정치성향 점수는 매우 진보적(-70점)이었지만, 이번 대선에선 상대적으로 덜 진보적(-40점)이었다. 이 후보의 공약 역시 낙선 후 ‘이념·노선 전향 현상’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이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중도로 분류되는 ‘경제 성장 촉진’ 공약이 빠지고 대신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라는 보수 공약이 추가됐다.

◆주요 정당의 공약 간 이념 차별성 희미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주요 정당 간 공약의 정치성향 차별성이 희미해지는 현상도 드러났다. 1980~1990년대만 해도 보수 정당은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진보 정당은 ‘민주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주요 정당의 공약은 진보 색채의 공약으로 점차 쏠림이 심해졌다. 20대 대선에선 여야 모두 ‘복지 확대’를 제1호 공약을 주장할 정도였다. 다만 이번 대선에는 주요 정당들이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우며 빠르게 우회전하는 양상이다.
김진주 선거연수원 지정교수는 “1980∼1990년대에는 민주화 이후 선거 역사가 길지 않았던 상황에서 각 후보의 정책과 공약이 뚜렷한 차이를 보였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대선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후보 간 정책 차별화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며 “공약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별성이 있어야 유권자가 실질적인 차이를 인지하고 합리적인 투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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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침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공익데이터 부문 활동가, 김장환 프리랜서 개발자, 김장현 성균관대 인공지능융합학과 교수, 이호 바이브컴퍼니 빅데이터 부문 기술사업부장(전무), 임승건 AI 데이터과학자, 폴라 레만 독일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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