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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서 아스팔트 우파로… 김문수는 누구인가 [6·3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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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05 20:00:00 수정 : 2025-05-05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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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 ‘문중의 별’
경북고 때 3선 개헌 반대시위했다 정학
서울대 진학 뒤 운동권 투신… 2번 제적
보일러공 조수 일하며 노동 운동 앞장

민중당 창당했다 보수 전향
YS 권유로 민자당行… “변절자 불려”
박지원 누르고 내리 3선 성공 ‘파란’
한나라당 37명 물갈이 공천개혁 주도

비주류 우파서 대권 잠룡으로
2012년 이후 선거마다 잇단 완패
자유통일당 등 거치며 우파 활동
尹정부서 노동장관… 보수계 전면에

“좌에서부터 우까지, 밑바닥부터 제일 위에 있는 사람까지 다 겪어봤습니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몇 차례나 강조한 표현이다. 김 후보만큼 한국 정치사에서 이념 스펙트럼의 끝과 끝을 오간 정치인은 찾기 어렵다. 1970년대 ‘운동권의 황태자’였던 그는 수차례의 변곡점을 거치며 ‘아스팔트 우파’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2025년, 김 후보는 보수정당 후보로서 대통령 당선을 꿈꾸고 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지난 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5차 전당대회에서 최종 후보로 확정된 뒤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청년 시절 운동권 근본주의자였던 김 후보는 세월이 흐르며 점차 아스팔트 우파로 변모했으며,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2022년 9월 김 후보를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임명한 데 이어, 지난해 8월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당시만 해도 김 후보는 차기 대선 후보군으로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가 보수층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해 12월11일 국회 긴급 현안질문이 꼽힌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국무위원들이 계엄 선포를 막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며 기립 사과를 요구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부분의 국무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지만, 그만은 거부했다. 김 후보의 ‘별의 순간’이었다.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시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방에 누우면 천장 틈새로 하늘이 보이는 초가집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지역 명문 학교였던 경북중과 경북고에 잇따라 진학하며 ‘문중의 별’로 떠올랐던 김 후보가 평범한 삶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인 1969년부터다. 3선 개헌 반대시위를 주동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한 것. 다행히 입시를 몇 개월 앞두고 정학이 풀려 대학 진학에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1970년 김 후보는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과 동시에 ‘후진국사회연구회’라는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했다. 당시 판자촌이었던 서울 용두동에서 시작한 자취생활은 그를 운동권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김 후보는 1971년과 1974년 두 차례 제적당하기도 했다.

 

학교 생활에 미련을 버린 김 후보는 노동운동에 집중한다. 무작정 청계천으로 향해 재단 보조로 취업했지만, ‘먹물’ 출신인 그가 하루아침에 노동자로 변신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 후보는 열관리기능사 등 7개 자격증을 딴 뒤 한일공업에서 보일러공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된 뒤 노동운동계의 신화적 존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 노조위원장이었던 설난영씨와 결혼한 것도 이때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뉴스1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2년간 복역했던 김 후보는 출소 후 진보정당의 제도권 입성 실험에 나섰다. 이재오 전 의원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당은 제14대 총선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득표율 미달로 정당 등록이 취소돼 해체됐다.

 

김 후보가 보수로 전향한 것은 1994년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민주자유당(국민의힘의 전신)에 입당한 것이다. 이 시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김 후보는 2006년 저서 ‘나의 길, 나의 꿈’에서 “재야에서는 나를 변절자라고 했다.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에서는 빨갱이라고 했다. 나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서 미운 오리새끼였다”고 아프게 회상하기도 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지난 3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제5차 전당대회에서 최종 후보로 확정된 뒤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

민자당에 입당한 김 후보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특히 첫 선거인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박지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키면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에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중진 37명을 불출마시키는 ‘공천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17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는 우리 아파트 20채 값이나 되는 돈을 들고 찾아왔지만 쫓아보냈다”고 돌이켰다.

 

내친김에 2006·2010년 두 차례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 연임에 성공한 김 후보는 2012년 18대 대선 경선을 기점으로 내리막을 탔다. 1위를 차지한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약 75%포인트 차이로 뒤진, 쑥쓰러운 2등을 한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선 ‘보수의 텃밭’ 대구 수성갑에서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 밀려 패배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선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23%를 간신히 넘기는 득표율로 박원순 당시 시장에게 완패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김 후보의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김 후보는 자유한국당 탈당 이후 자유통일당, 기독자유통일당 등을 거치며 아스팔트 우파로 활동했다.

 

김 후보의 ‘사람들’은 크게 친윤계 의원들과 실무 역할을 하고 있는 과거 인연들로 나뉜다. 경선 중 캠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장동혁 의원(총괄선거대책본부장), 박수영 의원(정책총괄본부장) 등이 대표적이다. 윤상현 의원 또한 2차 경선에서 합류해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경기도 대변인을 지낸 최우영 정책실장, 경기지사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노용수 상황실장,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박종철 열사의 선배로 사건의 중심에 있던 박종운 수행팀장 등이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후보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김재원 전 국민의힘 의원은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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