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대 중반에 한국 공군은 적의 레이더와 지휘통신망을 전자파로 교란하며 공중작전을 할 수 있게 된다.
군이 본격 추진하는 전자전기(블록-I) 개발 사업은 한국군의 전자전 능력을 ‘주한미군 의존’에서 ‘자립 수행’으로 옮기기 위한 첫걸음이다.

1조9206억원 규모의 이 사업은 단순한 기체 확보가 아닌, 한국이 ‘전파전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주도권을 회복하는 전략적 도전이다.
단 2대일지라도 적의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이 기체는 공중작전의 판도를 바꿔놓을 수 있다.
◆북한군 ‘눈’ 마비 역할
전자전은 전자기 스펙트럼으로 적 레이더와 통신장비 등을 교란해 아군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뜻한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으면서도 적군의 전자장비를 무력화해서 전략·전술적 우위를 얻는다.
지난 2022년 8월 당시 미국 하원의장이었던 낸시 팰로시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 중국군이 전자전기로 팰로시 당시 의장의 전용기 교란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전자전으로 맞대응하면서 실패했다.
공군이 시행하는 전자전에서 레이더에 대한 전자공격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레이더가 마비되면 공중에서의 위협을 사전에 대비할 수단을 잃기 때문이다.
전자공격은 적 레이더와 통신체계, 보호할 아군, 전자공격 플랫폼 간의 위치에 따라 원격지원재머(SOJ·Stand-off Jammer), 호위지원재머(ESJ·Escort Jammer)로 구분된다.

원격지원재머는 적 방공망 밖에서 다수의 레이더를 공격·마비시켜 적국의 영공에 침투하는 아군 전투기들을 보호한다.
적군 무선통신망과 지휘통제체계를 무력화하고, 아군 전투기를 요격하려는 적기를 관제하려는 지상 사령부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
먼 거리에서 레이더 및 통신 교란임무를 수행하므로, 강력한 출력을 지닌 전자장비가 필수다. 이는 장비의 무게와 크기 증가로 이어진다. 따라서 미군처럼 수송기(EC-130)나 비즈니스 제트기(EC-37B)처럼 탑재량이 많은 플랫폼을 쓴다.
호위지원재머는 아군 전투기들과 비행하면서 목표에 접근, 적군 탐지 및 추적레이더 가동을 방해한다.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는 전투기를 개조한 형태로서 대레이더미사일과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을 탑재한다. 미군 EA-18G 그라울러가 대표적이다.
EA-18G는 전자전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기체 중 하나다. 때문에 전자전기를 언급하면 EA-18G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국군 전자전기(블록-I) 사업은 비즈니스 제트기를 개조한 원격지원재머 방식을 적용한다. 외국산 비즈니스 제트기에 국산 전자장비를 탑재, 체계통합을 하는 형태다.
국산 KF-21 전투기가 있는데도 원격지원재머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전자전 외에 조기경보나 지휘통제, 정보전 등에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처럼 다수의 전자전기를 운용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선 소수의 기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전자전기를 다양한 임무에 투입하려면, 많은 장비를 탑재한 채 신속하게 이동하는 플랫폼이 필수다. 고속으로 먼 거리를 비행하는 비즈니스 제트기가 전자전기로 쓰이는 이유다. C-130 등의 터보프롭 수송기보다 비행고도가 훨씬 높고 항속거리도 길어서 공중 광역 전자전과 정보전이 가능하다.
이같은 추세가 반영된 것이 미 공군 신형 전자전기 EC-37B다. 걸프스트림 G550 비즈니스 제트기에 전술 전자전 기능을 탑재했다.
작전거리는 기존에 쓰던 터보프롭 전자전기 EC-130H(3000㎞)보다 훨씬 늘어난 1만㎞에 달하며, 적 전자전에 대응하면서 공세적인 전자전을 통해 레이더 등을 무력화하는 차세대 전자전 기능을 갖췄다.
360도 전방위 전자전이 가능한 공중 전자전 임무 수행체계(AMS)를 탑재하고 있으며, 데이터링크를 통해 공중·지상작전부대와 실시간 정보공유가 가능하다.
전자전기(블록-I) 사업은 EC-37B와 동일하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사업 방식은 EC-37B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참고 자료가 될 가능성은 있다.
북한군 방공망과 지휘통제체계를 교란·마비하고, 북한군의 전자전 시도를 저지하면서 정보를 공중·지상부대와 공유하는 작전도 가능할 전망이다. 북한군의 ‘눈’을 가리는 셈이다.

◆전자장비 개발→기체 통합 방식
방위사업청이 추진하는 전자전기 사업은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2023년 4월 사업추진기본전략이 확정됐을 때는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전자전 수행체계 개발을 주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선 업체 주관 개발로 변경됐다. 기술적 리스크 등을 고려해 단계별로 개발을 진행하는 블록-Ⅰ·Ⅱ 방식의 진화적 개발도 적용했다. 지난달 30일 의결된 체계개발계획에선 총사업비가 800억원 정도 인상됐다.
진화적 개발 방식을 적용한 것은 전자전기의 기술적 수준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전자전기는 수백㎞ 거리에서 다수의 레이더, 안테나 신호를 교란하면서 신호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고출력 방해전파를 쏠 수 있는 능동전자주사(AESA) 안테나와 강력한 전자전 체계 등이 필요하다. 강한 방해전파를 발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전자장비의 작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기술도 필수다.

ADD와 방산업계에서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실용화까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의 선진국처럼 전자전기 관련 경험도 부족하다. 진화적 개발 개념을 적용해서 리스크를 줄이며 개발을 진행하는 방안이 주목받은 이유다.
일단 블록-Ⅰ 2대를 만든 뒤 기술적 확장을 통해 2034년 이후 블록-II(2대)를 만들 전망이다.
블록-Ⅱ는 인공지능(AI)이 추가된다. 전자전 체계가 지능형으로 바뀌는 셈이다.
AI 기반 지능형 전자전 체계는 신호정보를 자율적으로 식별·분류·추적하면서 최적의 전파방해 기법을 매우 빠르게 찾아낼 수 있다. 사전에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관련 장비를 제때 개발한다면 실용화가 가능할 전망이다.
전자전기(블록-I) 사업에 뛰어들 업체로는 대한항공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LIG넥스원 등이 거론된다.

해당 사업은 개발 업체와 계약이 이뤄진 뒤, 관련 장비와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나서 기체에 통합하는 과정을 거칠 전망이다. 비행 안전성과 성능을 유지하면서 전자장비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장비를 탑재하고 통합하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대한항공과 KAI, LIG넥스원은 북한 지역 신호정보 수집과 미사일 발사 동향 등을 감시하는 백두 정찰기 관련 경험(사업명:백두체계 능력보강 1·2차 사업)이 있다.
대한항공은 2011~2018년 1차 사업에서 항공기 개조, 종합 군수 지원, 감항 인증 획득, 시험 비행을 했다. 당시 미국 방위산업체 L-3 PID와 협력해 1호기를 개조했고, 2호기는 단독으로 개조했다.
KAI는 한국군이 1990년대 도입한 백두정찰기를 대체하는 2차 사업을 2021년에 수주했다. 정보수집 장비, 송수신 시스템 등 주요 항전 장비 체계통합과 정보수집체계 운영을 위한 지상체계·통합체계 지원 요소 개발을 맡았다.
LIG넥스원도 2차 사업에서 통신정보(COMINT), 전자정보(ELINT), 미사일 발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화염탐지 기능이 포함된 계기정보(FISINT) 관련 임무장비 및 지상과 항공기 간 데이터 전송을 위한 데이터링크 개발을 맡았다.

백두 정찰기는 프랑스 닷소의 비즈니스 제트기인 팰콘 2000LXS에 각종 장비를 체계통합했다. 백두 정찰기에 전자공격과 방어 기능을 추가하면 전자전기와 가까운 개념을 지닌다. 따라서 백두 정찰기 관련 경험을 갖춘 업체들이 사업에 참여하기가 더 쉽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국제방위산업전시회(KADEX)에서 캐나다 봄바디어의 비즈니스 제트기인 글로벌 6500을 개조한 전자전기 모형을 전시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구체적인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형은 EC-37B를 연상하게 했다.
기체 플랫폼으로는 브라질 엠브라에르 E190-E2와 팰콘 2000XLS도 거론된다.
E190-E2는 내부 공간이 넓어서 장비 추가 탑재가 쉽고, 승무원 근무 여건도 좋다. 팰콘 2000XLS는 백두 정찰기에서 쓰고 있어 별도의 후속군수지원 체계를 꾸릴 필요가 없다. 글로벌 6500은 이스라엘에서 조기경보기와 전자전기 플랫폼으로 쓰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조만간 입찰공고를 거쳐 사업자를 선정하고 연내 개발에 착수할 방침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있으나, 전자전기의 중요성에 대해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전자전기 도입은 차기 정부에서도 지속될 전망이다. 적의 ‘눈’을 가리는 기술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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