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원칙 고집·시세 매몰 아닌 시의 살펴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카를 포퍼가 쓴 이 책은 매력적인 제목과 달리, 내 일상적인 문제를 푸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문제는 책의 중반에야 드러나듯이, 학문적 질문과 연구 방법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문적 질문이 떠오르면 포퍼는 ‘곧바로 그 질문과 사랑에 빠져들곤 했다’고 한다. 일에 쫓겨서 다른 분야로 관심이 옮겨갈 때라도 머릿속에는 늘 그 질문이 맴돌았는데, 창의적인 해법은 세 단계를 거쳐 나왔다고 말했다.

첫째,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단계이다. 둘째, 그 질문을 단순화하고 구체화하는 단계이다. 셋째, 전혀 다른 성질의 질문을 던진 후 원래의 질문과 결합하는 단계이다. 처음 질문을 놓치지 않되, 계기를 마련하여 심층 연구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하면 “원래의 문제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해가곤 했다”는 게 포퍼의 회상이다.
포퍼의 문제 해결 과정을 읽으면서 떠오른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은 어떤 제도가 반대에 부딪히거나 그 해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잠시 멈추어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마련해서 집중적으로 해법을 찾아내곤 했다. “백성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했다”는 평가를 받는 세금 제도 개혁 과정이 그 예다.
1430년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조정 신료들이 반대했다. ‘다수 백성이 반대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세종은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위로는 고관부터 아래로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명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여론조사 결과, 찬성 쪽이 9만8000여명으로 반대한 7만4000여명보다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공법 시행을 강행하지 않았다. 북쪽 지역 상당수의 백성은 여전히 반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세제를 실행할 고위 관료들이 새로운 세제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무려 10년간이나 공법 시행을 보류했다(1431∼1441). 보류 기간에 조정에서 한 일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척박한 지역 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 방안을 마련했다(토지별 차등 납세). 다른 하나는 일 맡은 신하들을 수긍시키는 비전 공감이다. 보류 6년째인 1436년에 “온 나라의 우물과 냇물이 마르고, 이 때문에 밀·보리까지 죽어간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른바 ‘병진년 대기근’의 상황에서 세종은 공법 문제를 어전회의에 다시 올렸다. 집현전에는 과거에 새 제도를 도입해 성공했거나 실패한 사례를 찾아보게 했다. 공법상정소라는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공법의 시행 시점과 관련해 이롭고 해로운 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했다. 토론과 숙의를 거듭한 끝에, 1441년 7월에 충청도에서 처음 시행되었고, 3년 뒤인 1444년에 최종안이 확정되어 시행되었다(전분6등·연분9등법).
나는 중간의 10년이야말로 세종 리더십의 빼어난 시간이라고 본다. 그는 다수가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를 내세워 강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 의견에 밀려 나라에 꼭 필요한 제도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서 그는 ‘감고작금(鑑古酌今)’ 즉 옛일을 거울삼고 지금을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울을 보듯이 그는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있는 그대로 자세히 살펴 성공과 실패의 패턴을 찾아냈다. 또한 황희, 허조처럼 책임 있는 핵심 인재들의 의견을 다각적으로 물어 시행 시기를 저울질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시의(時宜), 즉 때의 마땅함을 헤아리는 판단력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당대의 의견을 듣는 목적은 가장 알맞은 실행 시기를 헤아리기 위해서다. 원칙만 고집스럽게 따지다가 실패하거나, 반대로 형편만을 따라가다 우왕좌왕하여 일을 망치는 경우가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가.
시의에 맞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종의 세제 개혁 과정에 그 해법이 있다고 본다. 그는 먼저 새 제도에 대해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널리 물었다(廣問· 광문). 10년 동안 숙고하며 인재들과 비전을 공감했다(徐思·서사). 그리고 정밀하게 대안을 찾아서(精究·정구) 온 마음을 다해 실행했다(專治·전치). 그의 사후 약 250년간 시행되는 조선의 세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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