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만 더 빨리 반응했더라면…
무덤에 갈 때까지 자책할 것” 심경 밝혀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주(州) 댈러스에서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암살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 가운데 케네디의 리무진 바로 뒤에서 따라가는 차량에 타고 있던 남성이 황급히 리무진 뒷자석으로 뛰어 올라 타는 장면이 있다. 우리 대통령 경호처에 해당하는 미국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 소속 요원 클린트 힐(당시 31세)이 바로 그다. 사건 이후 힐은 평생 동안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이란 자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24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전직 비밀경호국 요원 힐이 지난 21일 캘리포니아주의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비밀경호국은 “끊임없는 헌신과 탁월한 봉사 정신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포함해 총 5명의 대통령을 경호했다”고 고인을 기렸다.
힐은 1932년 1월 노스다코타주 래리모어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1954년 졸업과 동시에 미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는 6·25전쟁 휴전 직후로 미국에도 아직 징병제가 있던 때였다. 기본 군사훈련을 마친 그는 정보 병과를 받고 약 3년간 방첩 임무에 종사했다. 1957년 군에서 제대한 힐은 비밀경호국 요원으로 채용됐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케네디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을 때 힐은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1963년 11월22일 케네디 부부와 린든 B 존슨 부통령 부부가 함께 텍사스주 댈러스를 방문했다.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존슨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케네디와 재클린은 리무진 오픈카를 타고 댈러스 시내 어느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총탄이 케네디의 머리를 관통했다. 재클린이 비명을 질렀고 뒤에서 수행하던 경호 차량에 탑승해 있던 힐이 재빨리 몸을 날려 리무진 뒷좌석에 올라 탔다. 리무진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동안 힐은 총에 맞아 의식을 잃은 대통령 그리고 옷에 남편의 피가 흥건히 묻은 영부인을 보호했다.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힐은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반응했더라면”(If I had reacted just a little bit quicker)이란 말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면서 “나는 무덤에 갈 때까지 그렇게 자책하며 살아야 할 것”(I’ll live with that to my grave)이라고 덧붙였다.
케네디 암살범은 당시 24세의 리 하비 오스왈드(1939∼1963)로 밝혀졌다. 오스왈드는 해병대에 입대했다가 사고만 치고 조기에 전역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한때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껴 소련(현 러시아)에 체류한 경험도 있었다.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암살한 이유가 무엇인지 수사가 한창이던 1963년 11월24일 잭 루비(1911∼1967)라는 이름의 남성이 경찰에서 감옥으로 이송되는 오스왈드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루비가 오스왈드를 죽인 이유 또한 미스터리였다. 1967년 루비마저 교도소에서 암으로 사망하며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힐은 케네디 암살 이후에도 비밀경호국에 남아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올라선 존슨을 비롯해 그 후임인 리처드 닉슨 그리고 제임스 포드까지 총 5명의 대통령을 경호하고 1975년 43세의 나이에 은퇴했다. 이후 펴낸 회고록 ‘11월의 어느 닷새’(Five Days in November)에서 그는 케네디 암살 순간을 떠올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짧은 시간이 내 인생의 결정적 시기로 영원히 남았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책에선 그가 케네디 등 5명의 대통령을 경호하며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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