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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붉은, 겨울, 나무, 눈동자,

관련이슈 박소란의 시 읽는 마음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2-03 23:09:03 수정 : 2025-02-03 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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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기

나무들은 겨울에만 나타난다

 

여름에는 사라졌던 불안한 눈빛

 

빈 가지로 바람의 등을 내리쳐야 하니까 떨어뜨린 이파리들이 겨울 밖으로 날아가야 하니까

 

실핏줄 터진 눈동자

 

불안을 감추고 밤과 함께 어둠 속에 가라앉는 붉은 태양

 

미간에 잠깐 나타나는 난폭함은 나의 것

 

나무라고 불렀을 때

나무 속에서 걸어 나와 네, 하고 대답한 뒤

다시 나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무

 

(하략)

추위 때문인지 겨울은 늘 너무 길고 막막하게 느껴진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쓸쓸하긴 마찬가지. 어느 것에도 좀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채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서곤 한다. 시를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겨울의 나무들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머뭇머뭇 망설이는 듯한 자세며 표정 같은 것. 수척한 몸으로 쪼그라든 잎과 열매, 하다못해 새들이 남기고 간 둥지까지 고스란히 품고 선 나무의 사정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시인은 밤의 음영 안으로 차차 숨어드는 나무에게서 어떤 불안의 감정을 읽은 것 같다. 실핏줄이 다 터진 나무의 눈동자를 포착한 것도 같다. 겨울이면 으레 사람도 나무도 평소보다 더 힘겹고, 저마다의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법인지. 유독 추워 보이는 나무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하고 불러 보고 싶은 마음. 그럴 때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은 나무가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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