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환경 변화에 예술로 공감대 형성 대응
도구 만들고 예술·종교 등도 전수
과거 기억·미래 조망하는 능력 갖춰
까마득한 원시시대 생활 모습 탐구
고군분투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우리가 처음 사피엔스였을 때―예술과 기술의 기원을 찾아서/김상태/사계절/1만6800원
피카소가 “그날 이후 모든 예술은 퇴보했다”고 감탄한 스페인 알타미라동굴의 황소,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귀여운 인도네시아 레앙테동게동굴의 돼지, 현대 도시의 담벼락을 차지한 그라피티 예술을 닮은 아르헨티나 리오핀투라스동굴의 손바닥….

수만 년 전 우리의 선배 사피엔스들이 세계 곳곳의 동굴 벽에 남겨놓은 그림들이다. 이들 벽화 주변에선 작은 등잔과 동물의 뼈로 만든 피리 등이 함께 발견됐다. 미술과 음악의 흔적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지구 환경의 대규모 변화에 대한 인간의 적응 활동이 예술의 기원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빙하기와 같은 기후변화는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현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단이 힘을 모으며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유대감이다. 이 감정은 집단 구성원 간의 정서 공유로 형성된다. 예술은 이렇게 집단의 생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싹텄다는 것이다. 예술로 표현된 상징은 곧 그 집단의 언어였으며, 이와 같은 고차원의 도구를 통해 사피엔스는 환경변화에 집단 차원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발전한 환경 적응력을 바탕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섬들과 남북극까지 진출하며 전 지구에 정착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절대 어둠으로 꽉 찬 동굴 안에 하나둘 작은 등불이 켜지더니 뼈피리 소리, 원시 타악기의 둔탁한 울림, 벽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야생 들소 떼, 붉은 손바닥 자국, 그 사이를 채우는 원시 언어와 몸짓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과 소리와 몸짓이 하나로 섞이면서 신명이 점점 고조된다. 그곳에 모인 구석기인들이 어떤 영감에 휩싸인 채로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화를 동굴 벽에 그리지 않았을까.
인류의 진화는 방향과 한계를 뛰어넘은 혁명이었다. 흔히 진화를 생물종이 자연환경에서 생존의 유불리에 따라 신체 기능을 한 방향으로 강화하거나 퇴화시키는 장기간의 변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진화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오해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 인류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간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고비마다 새롭고 다양하고, 그래서 절대로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맞닥뜨리며 진행됐다. 지구 생태계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으로 진화한 결과 인간은 불과 700만년 만에 먹이사슬 하층의 피식자에서 최상층의 포식자로 올라섰다.

인간이 이토록 극적으로 진화한 배경에는 생태계의 다른 생물체와는 극명하게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신체기관만 진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손과 발 이외에도 돌과 뼈로 만든 도구, 그물과 독(毒) 등을 개발해서 생태계 상위 포식자를 모두 제압했다. 나아가 인간이 창조한 고도의 무형유산인 예술과 종교 같은 정신문화도 도구를 통해 표현되고 전수됐다. 그러더니 집단 거주지인 도시를 만들고 농경을 시작하며 주변 환경을 논과 밭으로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전의 어떤 생명체도, 조상 인류도 가진 적 없는 매우 특별한 능력을 손에 넣었다. 아주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고 조망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인간이 발명한 기호나 문자로 기록된 시대를 학습했고, 다음에는 땅속에 남아 있던 유물들을 찾아내 과거를 복원했다. 20세기가 되자 만물의 원리를 이해하고 우주의 까마득한 역사를 추론하더니, 21세기에는 생명의 유전자인 DNA 정보도 해독해냈다. 놀라운 지혜의 확장을 통해 마침내 알게 된 미래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도 앞서 살았던 다른 모든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구상에서 멸종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인간과 자연을 깊이 탐구하여 거둔 성과 중 하나가 “우리는 반드시 멸종한다”는 명제다. 짧디짧은 개인의 삶을 넘어서 영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전자조차도 일개 종 단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살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개인이나 일개 종 유전자의 생애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은 결코 아니다. 그 역시 현재를 이루고 있는 토대의 일부이니깐. 그런 면에서 이미 소용을 다하고 버려진 수만 년 전의 보잘것없는 돌조각, 뼈피리나 조가비 목걸이, 황토 안료 덩어리 등은 지극히 소중한 역사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유별나고 도드라진 ‘점’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긴 ‘선’의 일부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구석기시대, 까마득한 원시의 일이다. 불의 열 기능을 발견한 호모 에렉투스와 불의 빛 기능을 분리한 호모 사피엔스, 뇌와 장의 활발한 에너지 교환 작용 끝에 가장 큰 뇌와 가장 작은 소화기관을 가진 영장류가 된 인간, 혹한의 빙하기를 견딜 옷을 짓는 도구이자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신구를 부착하는 도구이기도 한 바늘, 진화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가장 현명한 존재 노인, 최근 건강한 식사법으로 주목받고 있는 구석기 식단까지. 책은 원시의 생활무대가 오늘 우리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일깨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