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AI 기술로 이겨낼 수 있을까. 그 슬픔을 미룰 수 있을까. 저 또한 고민된 이야기였어요. 이 이야기의 힘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참여했어요.”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원더랜드’에서 태주를 연기한 배우 박보검은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의 이야기가 좋아서 바로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더랜드’에서 박보검은 한 인물을 두 가지 버전으로 연기한다. 연인 정인(수지)이 기억 속 데이터를 모아 만든 AI태주는 이상적인 남자친구다. 반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현실의 태주는 아직 뇌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해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어딘지 멍하고 못 미더운 남성이다.
영화 개봉 전인 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보검은 영화 속 ‘AI 태주’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밝고 긍정적이고 배려 많은 자세가 그랬다. 인터뷰에 참여한 취재진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려는 노력도 여느 배우에게선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박보검은 두 가지 성격을 연기한 데 대해 “AI 태주는 두 연인의 행복한 순간들이 기록된 영상, 사진을 기반으로 구현된 인물이라 ‘활동적이고 활발하고 이상적이고 활기찬 밝은 인물이구나’ 싶어 즐겁게 연기했다”고 말했다.
현실로 돌아온 태주에 대해서는 “감독님께서 태주의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며 “‘난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지’ AI 태주가 나인지 현실의 내가 진짜인지 혼란스럽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이 가득한 인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김태용 감독은 이 영화를 조각 그림을 모으듯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모아 만들었다. 가끔 시간·감정이 훌쩍 건너 뛰기도 하고 과거가 자세히 설명되지 않기도 한다. 태주도 왜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정인과 어떤 연인관계인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박보검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봤을 때 어느 정도 연인이기에 원더랜드를 신청할까 싶을 것 같아서 ‘아 이 친구들은 부모님을 일찍 잃고 고등학교 때부터 사랑을 시작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었구나’라고 설정해서 연기했다”고 한다.
그는 “시나리오에 보여지지 않은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며 “태주가 정인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카메라로 담지 않았을까 싶어서 (수지 배우와) 서로 만나서 대본 리딩할 때마다 사진찍자고 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찍어 놓은 예쁜 사진이 한 가득이다. 박보검은 “지금도 그 사진들을 많이 공개해 드렸지만, 영화가 사랑 받으면 더 많이 공개할게요”라고 약속했다.
이 작품은 4년전 촬영됐다. 촬영 당시 두 배우 모두 20대였다. 박보검은 “비주얼 면에서 시간의 흐름이 조금 보이는구나. 수지씨와 제 모습을 보니 ‘푸릇푸릇 청춘이다. 진짜 예쁘네. 우리 예뻤었다’ 싶다”고 한다.
영화 촬영과 개봉 사이 박보검은 군 복무를 마쳤다. 그에게 군 복무는 재충전과 성장의 시간이었던 듯 했다. 그는 군 생활에 대해 “전에는 저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신경 썼다. 상대방의 마음이 편하면 저도 편했다”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이 분이 편하면 난 괜찮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군대에서도 비슷했다.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챙겨야 할 후임이 늘었다. 문득 ‘나는 이렇게 (타인을) 챙겨주는데 나는 누가 챙겨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나 자신을 챙긴다고 챙겼지만, 나 자신을 온전히 돌아본 시간이 충분치는 않았나보다 싶었어요. 이미 가족, 팬분들,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시선을 나한테 확실히 돌려서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보듬어줄 시간이 충분했나. 물론 제 자신을 사랑하니 다른 사람을 아우를 여유가 있긴 했어도요. 군대에서 어떻게 보면 저 자신에게 ‘잘하고 있어’라고 응원해줄 수 있었고, 좋은 친구들·선임들을 만나서 충전을 많이 한 시간이 됐어요.”
나를 온전히 돌보는 방법의 하나로 그는 요즘 운동을 하루도 빠짐 없이 하고 있다. 전에는 생각나면 운동하는 정도였다. 박보검은 군 제대 후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도전하고 싶은 작품과 장르, 배역도 다양해졌다. 어릴 때는 경험한 세상이 적다보니 ‘내가 공감하지 못하면 이 역할을 잘 표현할까’ 싶어 고민이 많았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한살 한살 먹을수록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상황에 이렇게 말하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알게 되면서 하고 싶은 장르의 폭, 역할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차곡차곡 경험을 쌓는 와중에도 박보검이 늘 간직해온 마음가짐이 있다. 그는 “항상 생각한 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긍정의 에너지, 밝은 기운을 전해줄 사람과 일하면 힘을 많이 받잖아요. 그래서 내가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나’가 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을 변치 말자고 생각하면서 일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인품 때문일까. 박보검은 ‘원더랜드’ 시사회 때 “지금까지 작품한 감독님, 배우님, 작가님, 군대, 대학원 동기 다 연락드렸는데 다 오셨다”며 “되게 뭉클하더라”라고 말했다. “내가 지나온 시간 속에 함께한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걸음에 달려오니 복 받았구나 생각들었다”고 했다.
“앞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서 내 자녀, 가족이 봐도 ‘아빠 너무 재밌어, 시간이 지나도 재밌네’ 할 수 있는. ‘이 작품 봐주세요, 잘 봤어요, 보검씨 필모는 다 재밌네요.’ 이러면 좋겠어요. 그래서 앞으로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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