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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마음치유] 우울하지 않은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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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05 23:15:40 수정 : 2024-06-05 23: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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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5%가 생애 한 번쯤 겪을 만큼 흔해
일상에 지장 있는데도 진료 비율은 6%뿐

진료실 책상 앞에 앉은 우울증 환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나는 우울하지도 않은데 왜 우울증이라고 하시는 거예요?”라고 내게 반문했다. 이 환자는 피로감이 자꾸 몰려들어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과에서 진료받아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을 몇 군데나 돌아다녔지만 원인도 특효약도 찾지를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진료했던 의사가 정신과에 가보라고 해서 내게 왔던 것이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프다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뚜렷한 원인 없이 “가슴이 답답하다, 머리가 아프다, 소화가 안 된다”라는 증상으로 여러 병원에서 진료받아도 도통 낫질 않으니 “더 이상 찾아갈 곳이 없어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정신과에 왔어요”라는 환자도 종종 본다.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는데도 “혀가 뜨겁다. 이마에서 줄로 당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왼쪽 종아리 아랫 부분이 찌릿찌릿하다. 머리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다. 흐릿한 게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처럼 특이한 증상에 시달린다면 마음의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객관적인 검사 결과만 보면 통증이 심할 것 같지 않은데도, 주관적으로는 고통이 극심하다면 우울증이 겹쳐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반대로, 3개월 이상 만성 통증에 시달리다 보면 우울증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

성인 남녀의 우울증 평생 유병률은 각각 5~12%와 10~25% 정도다. 전체 인구의 25%는 살면서 우울증을 한 번쯤 겪게 된다. 이렇게 흔한데도 자신이 우울증에 걸린 줄도 모르는 환자가 많다. 우울증의 자기 인식률은 50%를 밑돈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항우울제가 아닌, 안정제나 수면제만 복용한다. 근거가 부족한 치료에 매달리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전체 우울증 환자 중 적절한 의학적 진료를 받는 비율은 6%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이라는 이름 때문일 텐데, 우울증 환자는 당연히 우울한 기분에 푹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우울감 없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개인적인 임상 경험에 비춰보면 “나는 지금 우울해서 미칠 것 같아요”라는 환자보다 “감정이 무뎌졌어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호소하는 사례가 더 많다. 취미에 대한 관심이 싹 사라지고, 친구가 재밌다며 권한 영화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총천연색 컬러 텔레비전이던 세상이 흑백 무성 영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렸다고 기분이 계속 우울한 건 아니다. 베스트셀러였던 책 제목처럼 기분은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데도 떡볶이는 먹고 싶을 수 있다. 비정형 우울증에서 흔한 양상이다. 이런 유형의 환자는 멀쩡해보이고 곧잘 웃기도 해서 우울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업무 스트레스가 오래 쌓이면 소진증후군, 소위 말하는 번아웃이 찾아온다. 초기에는 우울하다고 느끼지만 나중에는 이런 감정조차 사라진다. 번아웃에 빠진 직장인은 “집중력이 약해졌어요. 자꾸 깜빡깜빡해요”라며 인지기능 저하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우울해서 괴로운 게 아니라 제대로 일처리를 못 할까 봐, 그러다 업무 실수가 생길까 봐 불안해한다.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데도 ‘우울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나는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야’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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