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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과속·과적’ 다시 내몰린 화물노동자

입력 : 2024-04-21 19:22:19 수정 : 2024-04-23 15: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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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운임제 2022년 폐지 이어
정부 제안 표준운임제 국회 계류
적정운임 보장 안전장치 ‘실종’

30년 종사자 “운송료 20∼30%↓
고유가 속 목숨 걸고 밤샘 운전”
화물연대 “월수입 378만→242만원”

국토부 “법안 폐기땐 재발의 예정”

“하루하루 운 좋게 살아 있는 셈이죠.”

 

화물운송업에 30년째 종사 중인 천배(57)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씨는 “안전운임제가 폐지되고 운송료가 20∼30%씩 깎였다”며 “기름값까지 고공행진하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잠을 줄이고 과속에 과적까지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유가마저 크게 출렁이며 국내 ‘3고’(고물가·고유가·고금리) 위기 속에, 트럭이 다시 과로·과속·과적에 내몰리고 있다는 게 천씨와 같은 화물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화물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운송료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안전운임제가 2022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정부는 화주(화물운송을 위탁하는 기업)에 대한 처벌 조항을 없앤 표준운임제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21대 국회 임기가 한 달여 남은 21일 정부안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지 못한 채 폐기를 앞두고 있다. 적정 운임을 보장하는 안전장치가 사라지면서 화물노동자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천씨는 일주일 중 최소 엿새를 고속도로 위에서 보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컨테이너를 나르는 그는 일요일 늦은 오후면 일주일 치 옷가지를 싸서 집을 나선다. 화주 요청에 맞춰 월요일 오전 8시까지 경기 이천 창고에 수입품을 실은 컨테이너 배송을 마쳐야 해서다.

 

부산항에서 컨테이너를 실은 뒤 새벽 고속도로를 달려 이천 창고에 물건을 내리면, 곧바로 빈 컨테이너를 경기 의왕 ICD(내륙컨테이너기지)에 반납해야 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천씨는 서울 공장으로 향한다. 화요일 오전까지 부산항에 내려줄 컨테이너를 받아 싣고 또다시 새벽 고속도로로 나선다. ‘2박3일 왕복운송’은 일주일 내내 반복된다. 천씨의 경우 매주 3회가량 이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잠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루 4∼5시간 자는 쪽잠이 전부. 씻는 것도, 식사도 모두 고속도로 위에서 이뤄진다.

천씨가 이처럼 무리한 운행에 나서는 것은 안전운임제 폐지와 무관하지 않다. 안전운임제는 유가와 연동된 최소한의 운임을 보장했기 때문에 주말 하루 정도는 가족과 함께 보낼 여유가 있었다. 안전운임제가 폐지된 이후 최저입찰제가 부활하면서 운송료가 많게는 30% 가까이 깎였다. 고유가까지 겹치면서 휴식은 사치가 됐다. 장거리를 운행하는 화물 차량 특성상 기름값이 100원만 올라도 월 유류비 지출이 30만∼40만원이 늘어난다. 타이어·엔진오일·차량정비비 급등은 덤이다.

 

천씨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화물연대가 안전운임제 폐지 이후 시행한 실태조사에서 화물노동자들의 월평균 수입은 약 378만원(2022년)에서 약 242만원(2023년)으로 36% 감소했고, 일평균 노동시간 또한 1.5시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졸음운전·과속·과적 빈도 역시 늘어났다.

 

이에 화물연대 측은 안전운임제 재도입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표준운임제를 2025년까지 3년 일몰제로 시범 도입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표준운임제마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될 처지다. 정부안을 담은 법안은 지난해 2월9일 발의됐지만, 1년이 훌쩍 넘은 이날까지도 국토교통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2022년 12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노조법 2·3조 개정, 화물 안전 운임제 확대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안전운임제가 사라진 자리에 표준운임 가이드라인마저 부재한 ‘입법 공백’ 상태가 지속되면서, 화물물류 시장에선 배차만 해주고 수수료를 떼먹는 중간착취 구조만 부활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30년차 화물노동자 고정기(52)씨도 “적정 운임이 없어지다 보니 전화기 들고 배차만 해주고 수수료 받아 배불리는 중간착취 구조가 부활했다”며 “우스갯소리로 죽어라 일해서 정유사와 캐피탈(대출)사 노예로 산다고들 한다”고 푸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법안이 폐기될 경우 22대 국회에 재발의할 예정”이라며 “다만 표준운임위원회를 통해 시장이 참고할 만한 운임 가이드라인을 7월쯤 제시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승범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 교수는 “정부의 표준운임 가이드라인은 안전운임 시기보다 높은 수준에서 최저 시급에 준하는 운임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며 “가이드라인에 대해 강제성이 없다고 지적할 수 있지만,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안에 대해 화주들이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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