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이미 배정 완료 상황
전제조건 없이 대화 나서 달라”
증원 근거 논문 저자들도 “대화”
“정치권, 국정 난맥 중재 나서야”
정부 의료개혁특위 ‘개문발차’ 검토
“한발씩 물러나 협의 필요” 목소리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방침에 전체 전공의 93%인 1만1900여명이 수련병원을 집단이탈한 데 이어 의대 교수들이 집단사직에 나서면서 의정(醫政)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2000명 증원에 대한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정부는 의료계에 대화를 촉구하면서도 증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누차 확인한 반면, 증원 백지화를 요구하던 의료계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의대 정원 감축과 보건복지부 장차관 파면까지 대화 조건으로 내걸면서 양측이 마주보고 대화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의정 대화가 ‘2000명 증원’이라는 명제에 갇히면서 답답한 상황이 한 달 이상 계속되면서 정치권에서 타협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의료계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전공의와 대화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우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2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서 “27년 만의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정상화를 시작하는 필요조건”이라며 “의대 정원을 늘려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 수를 늦게라도 확충하려는 것”이라고 의대 증원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이 장관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3.7명인데, 서울을 제외한 16개 시도는 1.93명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의 절반보다 적은 시도가 10개나 된다”며 “고령화 추세에 따라 세계 각국은 의대 입학 정원을 꾸준히 늘려왔다. 미국은 지난 20여년간 입학 정원을 7000명 늘렸고, 프랑스는 6150명, 일본은 1759명 늘렸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이날 “현재 2000명에 대해서는 이미 배정이 완료된 상황”이라며 “(의료계는) 전제 조건 없이 다시 한 번 대화에 나서 달라”고 말했다.

정부는 전날부터 교원 증원, 교육시설, 실습시설, 기자재 확충 등 8개 분야에 대한 대학별 수요조사를 시작하는 등 증원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의료계에 대화를 촉구하면서도 관련 논문 3편을 근거로 도출한 ‘2000명 증원’은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이날 중대본 브리핑에서 ‘해당 논문 작성자조차 2000명은 과도하다고 한다’는 지적에 대해 “연구 논문은 객관적 추계에 대한 자료와 연구자 주관이 들어간 정책 제언이 있는데, (과도하다는 건) 본인 주관을 담은 정책 제언”이라며 “정부가 참고한 건 재정 추계로 3개 논문 모두 2035년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걸 기본 시나리오로 삼았다”고 밝혔다.
증원 계획 철회를 요구하던 의사들은 더한 조건을 내놓으며 정부와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전날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에 당선된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회장은 정부와의 대화 조건으로 의대 정원 500~1000명 감축,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폐기, 보건복지부 장차관 파면, 안상훈 전 대통령실 사회수석 국민의힘 비례 공천 취소를 내걸었다. 그는 “정부가 원점에서 재논의를 할 준비가 되고, 전공의와 학생들도 대화의 의지가 생길 때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의협은 “대한민국 행정부의 최고통수권자이신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이해당사자인 전공의들과 만나 현 상황의 타결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양측 입장이 긴 평행선을 유지하자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증원에 대해 타협과 조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의정 대화에 있어 ‘의제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했고, 안철수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은 “정부가 내년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면 ‘의료 파탄’이 일어날 것”이라며 “증원 규모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안 위원장은 이날 라디오방송에서 “지금 휴학한 학생들이 군대에 가면 내년에 인턴이 없어지고, 나중에 군의관과 공보의도 없어진다”며 “그 사람들이 돌아오면 2000명이 아니고 4000명을 교육해야 한다. 완전 의료 파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 위원장은 의대 증원을 2026년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다만 한 위원장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의료계가 (정부의 증원 방침을) 철회하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이라 대화를 먼저 하자는 취지로 안다”며 증원 규모는 타협 여지가 없다고 했다. 한 위원장 발언의 파장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4월 중 출범 예정인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에 전공의, 개업의, 의대교수 등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환자단체 대표 등 다양한 분야 관계자를 참여시켜 의사들의 참여를 촉구할 방침이다. 전공의들이 끝내 참여를 거부할 경우 다른 직역 관계자들과 ‘개문발차’하며 압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병원 문을 박차고 나간 의사들과 아무런 공감대 없이 구성된 특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될지는 미지수다.
임정묵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은 “2주 전이라도 대화 협의체를 구성했으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텐데 현재 의정 모두 출구가 없다”며 “이젠 조건 없이 협의를 시작하는 등 정면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2000명 증원 근거가 된 논문 3편의 저자들도 “지금은 대화에 나설 때”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통화에서 “정부와 의사들이 한발씩 물러나서 협의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며 “일단 의사들은 환자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행동의 도덕적 명분과 타당성이 중요한데, 의사의 본분을 떠난 행동을 타협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건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면서 “의료현장으로 돌아와야 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영석 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7일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전공의들이 먼저 복귀해 환자를 치료해 주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장하면 정부가 훨씬 무게감 있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조언했고,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는 “국회의원들이 국정 난맥의 중재자로서 (현 사태) 중재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의사들은 반대만 하지 말고, 그 근거를 대라는 목소리도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원점에서 얘기하자는 것은 그간의 정책 결정 과정과 논의 과정을 무시하고 의사들이 (정책을) 결정하자는 것”이라며 “국민이 의사들 행동을 지지하려면 정부가 제시한 2000명이 왜 잘못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료계가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정부가 정책을 철회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전공의(다생의)’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부와 의사의 강대강 대치 속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다”며 “모든 포커스는 의대 증원과 이를 둘러싼 의사와 정부 대립에만 몰려 있다. 사회 전체가 건강하기 위해 어떤 의료가 필요한지, 하다못해 어떤 방식으로 의사를 늘려야 할지도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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