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총선 승리 위해” 명분 내세워
해운대갑 하태경, 서울 중·성동을로
중·성동갑 홍익표는 ‘험지’ 서초을로
중진 서병수·김태호 조해진도 이동
“정치 신인 진입 문턱 높인다” 지적도
여야의 4·10 총선 공천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지역구를 이동해 출사표를 던진 전·현직 의원들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새로운 곳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인 만큼, ‘험지 출마’라는 명분을 내세운 경우가 대다수지만, 해당 지역에서 입지를 다져왔던 경쟁자들 사이에선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인지도가 높은 의원들의 지역구 이동은 정치 신인들이 나설 자리를 없애는 행보라는 지적도 흘러나온다.

◆“당을 위해” 자·타의로 지역구 옮긴 의원들
본인을 다선 의원으로 만들어준 지역구를 떠나 타 정당이 유리한 지역구로 공천을 신청한 사례는 여야 모두에서 나왔다.
21일 정치권에 따르면 3선 의원인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기존 지역구인 부산 해운대갑이 아닌 서울 중·성동을 출마를 선언했다.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4년 전 서울 49개 지역구 중 8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중·성동을은 더불어민주당 현역 의원이 있는 지역구인 만큼, 이곳에서 승리해 당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다. 하 의원은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중·성동을이 ‘한강 벨트’ 중심지에 있기 때문에 거기서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갑에서 3선 의원을 지낸 이혜훈 전 의원도 이번 총선에는 중·성동을로 자리를 옮겨 출사표를 냈다. 이에 따라 국민의힘에서는 이영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까지 포함해 3명이 중·성동을 지역에서 경선을 치르게 됐다.
민주당에선 홍익표 원내대표가 험지로 분류되는 서울 서초을 출마를 일찌감치 선언했고, 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지난 15일 홍 원내대표 단수 공천을 확정 지었다. 홍 원내대표는 2022년 자신의 기존 지역구(중·성동구갑)를 떠나 서울 서초을 지역위원장을 자청했다. 중진 의원으로서 험지에 뛰어드는 솔선수범을 보인 것으로, 대선·지방선거 등 굵직한 전국 단위 선거에서 잇달아 패한 민주당을 혁신해보자는 취지였다.
당의 요청에 따라 지역구를 옮긴 사례들도 있다. 국민의힘은 이른바 ‘낙동강 벨트’ 탈환을 위해 당 중진인 서병수(부산진갑), 김태호(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 조해진(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의원에게 지역구 이동을 요청했다. 세 의원은 당의 요청을 수용했고, 서 의원은 부산 북·강서갑, 김 의원과 조 의원은 각각 경남 양산을, 경남 김해을에 전략공천을 받았다. 이들 모두 ‘당의 총선 승리’를 지역구 이동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외에도 윤석열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박진 전 외교부 장관도 기존 지역구를 떠나 험지로 분류되는 인천 계양을과 서울 서대문을에 각각 출마했다.

◆경쟁자들은 부글부글…“자의 아닌 이들은 비판 어려워” 견해도
‘험지 출마’·‘당의 요청’ 등의 명분을 앞세우긴 했지만, 해당 지역구에서 미리 출마를 준비하며 공을 들여온 경쟁자들 입장에선 이들의 지역구 이동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김해을 김성우·김진일·박진관·서종길·이상률 예비후보는 지난 18일 조 의원이 우선공천을 받자 이의 신청서를 중앙당에 제출했다. 이들은 이의신청서에서 “조 의원의 우선 공천은 56만 김해시민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지역 정서에 반하는 것으로 또다시 민주당에 필패할 것이 자명하다”며 반발했다. 원 전 장관이 단수 공천된 인천 계양을에서는 윤형선 전 당협위원장이 이의신청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전·현직 의원들의 지역구 이동 출마에 대해 “각 당이 정당의 고유한 역할인 인재 양성을 소홀히 하고, 국민에게 알려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그들만의 게임’일 뿐”이라며 “지역구 주민들을 무시하고 오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후보 전략 때문에 우리 정치는 신인들이나 전문가들이 진입할 수 있는 문턱이 더 높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나라 선거 정치는 지나칠 정도로 인지도 중심주의”라며 “그렇다 보니 기존에 있는 인물들 중심으로 돌려막기를 하게 되고, 새 인물 발굴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전·현직 의원들의 지역구 이동이 당의 요청 등을 따른 것일 때는 ‘철새 정치’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분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전·현직 의원들이) 자의로 움직인 게 아니라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역구를) 자의로 옮긴 게 아닌 것을 두고 ‘철새’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며 “자기 지역구에서 (당선이) 안 될 것 같아서 옮긴 사람들이라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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