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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날리면’ 판사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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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2-02 22:50:19 수정 : 2024-02-02 22: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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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했나?”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52세 남성이 30세 여성에게 돌발 질문한다. 여성이 “안 했는데요”라고 하자 남성은 “안 해서 그렇구먼”이라며 혀를 찬다. 남성은 누굴까? 2014년 6월 세계일보의 ‘철피아(철도+마피아)’ 고발기사 정정 여부를 다투던 언론중재위원회 심리장. 52세 남성은 서울서부지방법원 소속 부장판사였고 30세 여성은 기자였다.

10년 전 녹취와 취재자료들을 꺼내봤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여럿 했다. “내가 메이저 신문사 국장을 좀 아는데”, “기자들은 운동화에 막걸리 타 먹이고 세게 가르치지 않나?” 지면 관계상 7개월간의 스토리를 다 실을 순 없지만, 법원행정처가 만든 법정진행 매뉴얼이 유의해야 할 4대 언행으로 꼽는 △망신·면박 주기 △고압적 언행 △지나친 예단·선입견 드러내기 △불공평한 진행 사례가 다 나왔다. 준사법기관인 언중위 심리는 당사자들에겐 ‘예비 재판’이나 마찬가지다. 엄중한 자리에서 들을 거라곤 상상 못 한 말들이었다. 이후 막말 판사의 세계를 취재했다. 국가인권위 상담사와 시민단체가 ‘결혼’ 발언은 ‘비혼여성 차별 발언’이란 판단을 줬다. ‘막걸리’ 발언도 특정 직종에 대한 편견·비하라고 했다. 법조계 취재 중 그가 얼마 전 법정에서 반말을 해 민원이 들어갔다는 말도 들었다.

김예진 외교안보부 기자

사법신뢰가 무너진 충격은 컸다. 앞으로 살면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운 나쁘면 이런 판사가 걸리는 건가 싶어 아찔했고 우리나라에 사는 게 불안해졌다. 그러다 지난해 초, ‘날리면’ 사건 배당을 보고 9년 만에 그 이름을 확인했다. 전국 판사 3214명 중 하필 그였다.

“판사가 대체 누구야?” ‘날리면’ 1심 판결이 나오자 사람들은 묻는다. 저마다 ‘성지호 판사’를 검색해 도가니 법정 수화통역 거부 건, 장자연 사건 보도 언론사 패소 건 등 옛 기사를 보곤 “그럼 그렇지!” 하며 더 분개했다. 정부는 판결 후 “논란이 이제 종결되길 바란다”고 했지만 현실은 반대로 흘렀다. 판결은 논란을 재점화했고 판사의 전적이 소환돼 더 거세졌다. 판결은 언론 억압에도 용기를 줬다. 방송통신심의위가 다른 언론사들까지 중징계 운운했다. 판결은 분쟁의 해결이 아니라 분쟁의 새로운 시작이 됐다. 사법부는 정의로운 질서의 보루로서 권위가 중요하나 판결 후 현상을 보면 사법부는 권력은 있어도 권위는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10년 전 기자는 공적인 자리에서 왜 사적인 질문을 하느냐 따지지 못했다. 당장 불이익이 될까 봐 꾹 참고 답했다. 이런 경험을 한 국민이 한두 명일까. “그럼 그렇지” 하는 분노가 우연일까.

법원은 막말 판사로 인한 사법불신 방지책으로 매년 1억여원을 들여 책자를 만들고 판사들에게 컨설팅을 해준다. 훌륭한 판사는 더 훌륭해졌겠으나 몽매주의에 빠진 이들을 깨치진 못한 모양이다. 성 판사는 이번 재판 중에도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MBC 측에 “너무 확정적으로 보도한 데 대해 책임감은 있어야지 않냐”며 예단을 드러내고 불필요한 훈계를 해 언론에 보도됐다. ‘재판장이 예단·편견을 가지면 재판 결과는 물론 진행도 부적절하게 된다’, ‘강제력만으로 국민에게 재판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 ‘좋은 재판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재판이다’ 법정진행 매뉴얼 속 문장들이다.


김예진 외교안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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