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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후배 진아는 맞벌이하는 딸을 위해 5살 손녀를 돌봐주는 엄마가 울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유통기간이 지난 진간장으로 손녀 먹을 반찬을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눈이 침침해서 유통기간 표시가 잘 안 보여서 그랬는데, 앞으로 눈은 더 침침해지고 무릎은 더 아파지고, 그러다 손녀를 돌봐주기는커녕 늙은 자신을 자식들이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두려워서 운다는 것이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자신이 짐이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엄마.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두 오빠와 함께 진아를 동네 이발소에 데리고 갔다. 두 오빠의 이발이 끝나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진아를 이발소 의자에 앉혔다. “또 덤으로 해 달라고?” 이발소 주인인 박씨 아저씨는 툴툴거렸지만 덤이라고 해서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아는 두 오빠의 이발료에 묻혀서 공짜로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전학 온 반장 아이가 제 아빠 손을 잡고 이발소에 들어오는데 거울로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너무 부끄러워 달아나고 싶었다.

그날 진아는 엄마한테 앞으로는 이발소 안 간다고 펑펑 울었다. 엄마는 진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미용실은 너무 비싸서…. 고등어 두 마리 값인데.” 그 시절 엄마의 잣대는 아버지와 자식들이 좋아하는 고등어였다. 그래도 엄마는 그다음부터 고등어 두 마리 값인 미용실로 진아를 데리고 갔다. 대신 엄마 것을 아꼈다. 엄마 것이 별로 없어서 더 아낄 것도 없지만 엄마는 용케 찾아냈다.

집안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식사준비를 하고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집안을 살펴보고 잠든 자식들 이불 덮어주며 토닥여주고 엄마를 위한 시간도, 엄마를 위한 공간도 없이 그렇게 달려온 세월, 어느 날 진아가 물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아?” “내가 뭘?” 그러면서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헌신과 희생에 값을 절대 매기지 않는 엄마. 아니 단 한순간도 헌신과 희생이라도 생각하지 않는 엄마. 새해에는 세상 모든 어머니가 특별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라디오 음악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김 피디는 동숭동에서 연극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장남과 가장이란 무게가 어깨를 누르고 있어서 꿈을 다음으로 기약했다. 종종 김 피디가 방송국 복도 끝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 “이번 장마로 시골집 축사가 무너져 빨리 고쳐야겠다”는 늙은 아버지께 김 피디는 말한다. “네, 네, 얼마 보내드릴까요?” 큰 아이 작은 아이 수영 강습비와 치과 안과 검진료를 오늘까지 내야 하는데 좀 부족하다는 아내에게 “알았어. 바로 보낼게” 한다. 본의 아니게 지나가다가 김 피디와 눈이 마주치는 날이면 김 피디는 박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눈부셔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책임과 의무가 먼저인 고단한 삶에 김 피디는 별 유감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새해에는 세상 모든 김 피디가 특별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조연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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