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감소 속도 빠르고 초기 대응도 늦어
재정 투입해 효과 보는데만 20년 걸려
‘죽음의 계곡’ 넘을 컨트롤타워 갖춰야
‘출산 vs 출생’ 용어 논쟁은 본질 벗어나
국가 역할만큼 기업의 개선 노력 중요
인구는 국가를 유지시키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합계출산율 ‘0.78명’이라는 충격적 숫자 앞에서도 한국 정부의 위기의식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외쳤지만 말뿐이었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한미연)은 향후 인구 구조 변화가 가져올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책과 정책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출범한 민간연구기관이다. 저출산 문제를 떠나 한반도와 미래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통일’까지 염두에 뒀다고 한다.
지난 22일 서울 삼성동 한미연 사무실에서 만난 이인실 초대 원장은 “정부의 인구위기 초기 대응이 너무 늦었다”면서 “지금이라도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강제력 있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의 경력은 다채롭다.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낸 대한민국 1세대 여성경제학자이자 국회예산정책처 경제분석실장과 통계청장 등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이 원장 뒤편의 퉁명스러운 모습의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기업이 인구회복의 길에 앞장선다’는 포스터 문구가 이채롭다. “동생을 갖고 싶어 화가 난 앵그리베이비다. 우리는 그냥 미연(한미연)이라고 부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미연이 포스코, 한국무역협회, 삼성물산, 한양대 등 민간·대학과 다양한 파트너십을 맺은 이유다.
―다채로운 경력과 달리 인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9~11년 통계청장 당시 인터넷 시대에 맞는 인구센서스를 추진했었다. 최근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에서 퇴임했다. 경제학에서 중요한 자본과 노동의 한 축이 인구다. 대학에서 한국경제론을 가르칠 당시에도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인구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던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의 제안에 응한 것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민간기관으로서 한계는 없나.
“오히려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인구 문제에 대해) 민간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 정부보다 더 유연하게 인구 위기에 대한 이슈화도 가능하다. 나아가 단순히 인구 문제를 넘어 이와 관련된 아동인권, 여성권리, 지방소멸, 이민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고 사회적 공론화 작업에 나설 수 있다. 한미연 출범 취지에 맞춰 대한민국이 직면한 인구 위기를 다각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정책 및 해결 방안을 제시해 나갈 것이다.”
―저출산 위기는 어느 정도인가.
“집을 예로 들어보자. 30평 살다가 50평 넓은 곳으로 옮기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집 크기를 줄여서 가려면 그동안 갖고 있던 짐들을 버리느라 힘든 것과 같은 원리다. 인구가 줄면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올라가고, AI(인공지능)가 대체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다. 전 세계에서 산업화를 이룬 나라는 모두 인구 감소를 겪었다. 공통적인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런 나라가 없다. 성비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대체인구(인구가 현상 유지되는 데 필요한 출산율) 수준은 출산율 2.1명인데 우리는 3분의 1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유럽에서 출산율이 제일 높은 프랑스가 1.83명이다. 우리나라 기준에서 초저출산은 1.3명이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1.3명 이하로 내려가면 턴어라운드가 어렵다. 국가를 유지해야 할 교육, 국방, 안보, 문화 등 각종 사회시스템이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기업들이 일찌감치 인력부족 얘기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 (인력부족으로) 공장 운영이 안 되다 보니 해외로 들고 나갔다. 삼성이 베트남에 공장을 짓고 해외로 진출한 것이 극명한 사례다. 인력부족 문제는 소비시장의 행태도 바꾼다. 젊은층들이 미래보다는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쓰다 보니 저출산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언젠가는 턴어라운드할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런 가능성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게 더 암울하다.”
―‘출산율’이라는 용어를 ‘출생률’로 하자는 말도 있다.
“출범식 당시 ‘저출생’이라고 했더니 법적 정의를 왜곡한다면서 어떤 분이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단체 등이 저출산이라는 단어가 ‘여성은 아이 낳는 도구냐’로 인식된다며 비판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저출생이라는 단어가 출산 자체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보고 생명을 경시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항의도 있었다. 무엇보다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 인구위기를 끄집어내 공포마케팅을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인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저출산과 저출생 모두 언어가 가진 중요한 함의가 있지만 국가 소멸위기에 직면한 현 시점에서는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간의 인구 대책이 실패한 이유는.
“초기 대응이 너무 늦었다. 1983년도부터 출산율이 2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산아제한 얘기를 하고 있었을 정도다. 2005년에서야 저출산·고령화 얘기가 나왔지만 그때 예산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해 51조원의 저출산 대응 예산 가운데 청년주택 등 국토교통부 관련 예산이 46%인 23조원에 이른다. 저소득층·청년 등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지원이 저출산 예산으로 둔갑했다. 심지어 일선 학교의 낡은 책상 교체도 저출산 대응 예산이다. 실제 육아, 양육 등 저출산과 밀접한 예산은 20조원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이 뒤늦었다는 얘기인가.
“저출산고령화사회 기본법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법을 통해 인구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에 비해 사회가 너무 빨리 변했다. 정부가 뒤따라가면서 정책을 폈지만 출산·육아 등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도 선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서구에서 200∼300년 걸리던 산업화 과정을 우리는 50∼60년 만에 이뤄냈다. 그때 만든 온갖 제도와 법들은 팽창사회에나 유용했다. 2020년부터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가 발생했다. 거기에 맞춰 법과 제도도 바뀌어야 했다.”
―재정은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해온 거 아닌가.
“인구 문제를 접하면서 재정학자로서의 소신까지 바꿨다. 저출산·고령화 대응 예산은 획기적이면서 담대하고 지속가능하게 써야 한다. 찔끔찔금 임기응변식으로는 안 된다. 그동안 282조원을 투입하고도 성과가 없는 이유다. 골든타임이 5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예산을 순수하게 인구 대응으로만 쓴다면 적은 예산은 아니다. 리스트럭칭한다는 전제하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출산문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장이 대통령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첫 회의를 주재했다.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가 7년 만이라는 게 놀랍다. 위원회가 모든 걸 총괄한다지만 각 부처 저출산 대책을 짜맞추기하는 식에 그치고 있다. 먼저 5000만명이건 6000만명이건 인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출산율을 높인다는 막연한 구호로는 성과를 내기 힘들다. 목표를 세운 후 거기에 맞춰 국가 차원의 치밀한 전략과 대응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국가가 돌아가려면 인구부양비에 맞추는 게 시급하다. 그런 계산 아래에서 우선 여성의 경제활동을 스웨덴 수준으로 대폭 올려야 한다. 스웨덴은 서유럽 국가 가운데서도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나라다. 노동시장 진입 연령도 낮추고, 정년연장·고용연장 등도 급선무다. 연금 수령시기를 늦추는 대신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이민은 단순히 값싼 노동력을 들여오는 차원이 아니라 산업 수요에 맞는 인력수급계획과 더불어 인구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부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산하에 인구정책 기획단을 만들었다.
“정부 내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과거에도 그런 움직임은 많았지만 아까운 시간만 보냈다. 획기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금 위원회는 예산도 없고, 이를 실행할 인력도 없다. 각 부처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구정책은 재정을 투입해 효과를 보는 데만 20년 이상 걸린다. 그때까지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을 넘어야 한다. 인구 문제를 총괄적으로 전담할 컨트롤타워를 세워야 한다.”
―인구 문제에 대한 기업의 역할은.
“국가의 역할만큼 기업의 노력도 필요하다. 기업들이 육아 등 각종 보장제도를 많이 갖췄다지만 여전히 출산과 휴직에 대한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제도와 법률이 있더라도 결혼과 출산은 오롯이 개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인생의 절반을 보내는 직장에서 마음 놓고 애를 낳고 키우는 게 불편하다면 선뜻 선택을 하겠는가. 기업들이 육아나 출산에 대한 환경을 바꿔줘야 한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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