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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다 한 이야기”… 꺾이지 않는 ‘시네마 드림’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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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14 06:00:00 수정 : 2023-06-14 00: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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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굴곡과 집념… 영화 같은 인생

저예산 단편영화 찍다가 위기
아파트 팔고 단칸 월세방 생활
도가니·러브픽션 ‘대박’ 터져
고생한 가족 위한 ‘개훔방’ 제작
스크린 독점에 흥행 참패 ‘쓴맛’

#시련에도… 영화 사랑 ‘노빠꾸’

독립영화, 상업영화 발전 토양
환경 척박해도 지원 계속돼야
상업영화 제작 ‘엄격 잣대’ 필요
알바·대학강연 뛰며 신작 기획
만들고 싶은 영화 있어 또 뛴다
‘도가니’, ‘러브픽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2010년대 초중반 큰 주목을 받았던 한국영화들이다.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탄생 뒤엔 산파인 제작자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가 있었다. 한때 언론의 주목을 받은 뒤, 지금은 묵묵히 중견 제작자의 삶을 사는 엄 대표를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나 굴곡지면서도 집념이 배어 있는 그의 ‘인생 영화’ 얘기를 들어 봤다.


“도가니는 2008년 삼거리픽쳐스를 만들고서 첫 상업 장편영화였는데, 잘돼서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고마운 작품이죠. 원래 회사를 차린 건 러브픽션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투자받기가 힘들던 중 도가니 작업을 먼저 하게 됐어요. 처음엔 이런 소재론 흥행하기 어렵다며 내부 반대도 심했죠.”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영화 ‘도가니’는 실화 기반의 공지영 작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2011년 개봉 당시 세상에 충격을 던졌고, 동시에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46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 중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왕의 남자’, ‘괴물’, ‘해운대’밖에 없었으니, 소재와 상영 등급을 고려했을 때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일어난 청각장애아들을 대상으로 한 교장과 교사들의 성폭력과 아동학대라는 끔찍한 진실이 널리 알려지며, 관련 사건의 재수사가 이뤄지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등 사회적 파장 역시 대단했다.

이후 2012년 개봉한 하정우·공효진 주연, 전계수 감독 연출의 ‘러브픽션’도 172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영화는 공효진의 첫 로맨틱 코미디 출연작으로, 당시 겨드랑이털(가짜로 만든)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2023.06.08 남정탁 기자

두 영화만 놓고 보면 벼락 성공을 거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인생 시계를 좀 더 돌려 보면 오랜 준비가 이룬 결실이었다.

엄 대표의 사회 첫발은 영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엄 대표는 물류 관련 대기업 재무팀에서 약 10년간 일하며 자금·주식·회계 업무를 담당했고, 그 후 8년여간은 벤처캐피털에서 벤처기업 투자와 인수·합병 등을 담당하며 영화 산업에도 인연이 닿았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학력에 대한 차별이 되게 심한 나라잖아요. 그래서 어느 회사를 정년 퇴임할 때까지 다니겠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접었고, 10년에 한 번 정도 새로운 어떤 일을 해 보자고 고교 시절 목표를 세웠어요. 그러다가 영화산업에 발을 디디게 된 거죠.”

2003년 영화계 이직 당시엔 주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예술영화를 제작하던 영화제작사에서 제작본부장을 맡았고, 이후 중대형 상업영화를 제작하던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제작본부장으로 12편의 극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2023.06.08 남정탁 기자

야심 차게 삼거리픽쳐스로 독립했지만, 2010년까지 저예산의 장편 영화 5편을 제작하면서 모은 돈도 다 쓰고, 가족과 함께 사는 서울의 아파트마저 판 뒤 바로 옆 재개발 지구의 단칸 월세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래서 사업 시작 후 몇 년간은 가족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이들의 상처가 너무 컸더라고요. (친구들이 알까 봐) 하교를 하면 살던 집 아파트로 들어가서 친구들이 있는지 보고 (이사한) 우리 집으로 왔다고 해요.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당시 목표였어요.”

영화의 성공으로 엄 대표는 3년3개월 만에 다시 집을 샀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제작했다. 2014년 개봉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바버라 오코너가 쓴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어느 날 아빠와 함께 살 집이 없어지고 동생, 엄마와 함께 봉고차에서 지내게 된 열 살 소녀 ‘지소’가 부잣집 개를 훔쳤다가 돌려주는 방법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이야기다. 사업 때문에 집을 판 엄 대표의 사정과 닮았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저한테 기쁨도 줬고, 안타까움도 준 영화죠. 영화 때문에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줬고, 그것에 대한 미안함과 사과 같은 걸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영화엔 사실 아빠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엄 대표는 영화 속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아빠가 자신처럼 하루빨리 가족들에게 돌아가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전했을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경제적으로 가족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는 3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고, 다행히 집까지 팔진 않았지만, 엄 대표는 이때 많은 것을 잃었다.

상업적 실패에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화제가 됐다. 못 만들어서 망한 게 아니라, 개봉관을 잡지 못해 상영할 수가 없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김혜자, 최민수, 강혜정, 이천희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기자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점을 받았지만, 당시 ‘국제시장’ 등 몇몇 영화가 대부분의 상영관을 차지하며 대기업 스크린 독과점 논쟁을 일으켰다. 안타까운 마음에 출연진과 관련이 있는 타블로, 김수미, 진구, 박휘순 등이 대관을 위해 나선 것으로 알려졌고, 안철수 의원이 국회에서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그 결과 개봉한 지 한 달이나 된 영화의 상영관이 다시 늘어나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이미 철 지난 영화를 되살리진 못했다.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2023.06.08 남정탁 기자

당시 엄 대표는 흥행 실패의 책임을 지고 영화제작사들의 연합 배급사였던 리틀빅빅쳐스 대표에서 물러났고, 방송 출연과 대통령 호소문을 통해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하며 ‘영화 상영 원칙과 기준을 세워 달라’고 목소리를 냈다.

“다시는 영화로 뭘 하겠다고 상상하지 말자. 영화로 사과하지 말자 생각했죠.”

당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는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가 7년여 만이라고 했다. 2012년 영화 전문 기자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제작자’로 꼽혔던 그는, 이후 묵묵히 ‘내 심장을 쏴라’에 제작·투자, 2018년 ‘괴물들’의 기획 등을 맡으며 영화 인생을 이어 왔다.

지난 4월엔 투자·제작을 맡은 양윤모 감독의 독립영화 ‘튤립 모양’이 개봉했는데 수백명의 관객이 드는 데 그쳤다.

“제 작품 역대 최저 관객 기록이에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났지만,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습관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뉴미디어에 많이 익숙해져 어려운 게 있어요.”

다른 독립영화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는 한국영화가 어렵다고 해도 독립영화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과 지원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2023.06.08 남정탁 기자

“이건 불변의 가치에요. 독립영화는 영화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도 같고, 엄마와도 같은 존재거든요. 창작자가 상상력을 가장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순수한 시작점이죠. 상업영화가 발전하기 위한 토양 같은 겁니다.”

독립영화라는 토양이 척박해지면, 한국영화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어진다는 설명이다. 반면 상업영화의 경우엔 좀 더 엄격한 잣대로 제작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시나리오부터 흥행 요소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요즘 ‘범죄도시3’의 성공엔 반색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늘어나는 건 제작자로서 환영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논란이 되는 영화 티켓 가격 인상도, 영화인들이 대기업 계열사라는 이유로 극장의 수익 문제를 등한시한 데 한 원인이 있다고 봤다.

한때 상영관 문제로 피해를 주장했던 그이지만, “극장이 살아야 영화도 산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엄 대표의 삶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는 억새를 닮았다. 강풍에 흔들려 누울 만큼의 위기를 겪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부러진 적은 없다. 그는 올가을 크랭크인(촬영) 예정인 ‘써니데이’의 제작을 맡았고, 인생 첫 각색에도 도전하는 터라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런 와중에 주말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 강연도 나간다. 최근엔 호프집 운영도 준비 중이다. 먹고살아야 하고 영화도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대신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

“영화계에 들어온 지도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본인의 룰을 어긴 거 아니냐며 주변서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만두라는 얘기냐고 하면 그건 또 절대 아니래요.”

그는 아직 그만둘 때는 아니라고 했다.

“일반 기업과 달리 영화는 한 작품을 만드는 데 10년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어서, 일반 회사의 10년이라는 기준하고는 다른 계산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스스로 타협을 했죠. 내가 만들어야 할 영화들을 만들고 그만두자.”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 /2023.06.08 남정탁 기자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일 것인지에 대해선 말을 아꼈지만 머릿속에 인생 영화로 생각하고 있는 몇 개의 작품이 있다고 했다. 그중 한 작품을 내년쯤 제작하려 계획하고 있으며, 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던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를 지금까지 10년 넘게 붙잡는 영화의 매력은 뭘까.

“이 영화가 1000만 관객이 들 거다 이런 꿈을 꾸고 작업하는 건 없어요. 적어도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끼쳐선 안 된다 생각하고, 그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죠. 소위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하는 거예요. 보통 영화를 하는 분들이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꼭 만들어야 할,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죠. 내 행위의 결과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제작자 엄용훈은…
●1967년 서울생 ●경기상고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 전공 ●엘제이필름 제작본부장,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제작본부장, 판타지오 부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무국장 겸 집행위원 역임 ●현 삼거리픽쳐스 대표이사,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도가니, 러브픽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등 영화 29편 제작 또는 투자·배급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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