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쭐거리는 거짓된 우월성 추구는 ‘독’

사회적 지위를 보면 대한민국 최고라 해도 과장이 전혀 아닐 한 40대 여성이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요”라고 말했다. 학교 성적으로 앞서나갔고, 명문대에 진학했고,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까지 얻었지만 ‘나는 초라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엔 그녀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숨기려 해도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가난 때문에 또래들에게 무시당했던 고교 시절의 상처가 중년이 된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는 과거사를 내보이니 그제야 나는 ‘그래서 괴로웠던 거구나’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간은 자기 가치를 스스로는 증명하지 못하는 불운한 존재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는 나를 사랑해!”라는 믿음만으로 자존감은 지켜지지 않는다. 남들로부터 받는 관심과 인정, 존중과 사랑이라는 헬륨이 없으면 자존감이라는 풍선은 금방 쪼그라든다. 아주 작은 무시와 멸시도 바늘처럼 자존감을 꺼뜨려 버린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애정을 주지 않으며, 언제나 모멸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열등감을 갖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부러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눈에 띄지 않는 결함을 반드시 갖고 있다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나약함에 대해 잊지 않아야 한다.
열등감은 나쁜 게 아니다. 다중지능이론의 창시자 하워드 가드너 하버드대 교수는 “성공한 인물의 상당수가 불행한 과거에서 연원한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이가 승리를 쟁취하는 사례가 차고 넘친다. 자신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망이 승리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과거의 불행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승부욕을 끓어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동기를 일컬어 심리학자 아돌프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라고 했다. 주어진 운명을 바꿔 놓는 힘이 바로 열등감인 것이다.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과 상황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열등감을 떨쳐버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권력으로 무장해서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는 거짓된 우월성을 추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해봤자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고 공허감까지 벌칙처럼 떠안게 된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나는 더 나아질 거란 기대가 중요하다.
열등감을 자극받으면 사람은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기 특성에 자동적으로 주의가 옮겨지고 괴로움을 느낀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열등감을 느끼더라도 반응을 달리 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자기가 가진 허접함과 못마땅함이 때때로 열등감을 일으킨다 해도 그런 부족함조차도 나란 사람을 완성시키는 필수 성분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다독여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잘 안 될 때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채를 뿜어내는 자기 인격을 가리키며 스스로에게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나는 자랑스러워!”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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