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측 요구로 신속 재판 지연
“구속 기간내 심리 종결 어려워”
구속대체·석방제도 도입 제안
일각 “인권보호 약화 우려” 지적
“구속기간 내에 증거조사를 마치려면 복잡한 사건은 일주일에 재판 기일을 2회는 열어야 돼요. 변호인들의 반발이 심합니다. 재판 준비 시간 부족을 이유로 기일 간격을 늘려 달라고 하죠. 기업범죄의 경우 물적 증거가 불명확해 증인의 뉘앙스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기업 총수가 (구속기간 만료로) 불구속재판을 받게 되면 핵심 증인들이 영향을 받습니다.”(재경지법 형사부 A재판장)
“일반인들은 구속기간 제한으로 인해 피고인의 각종 신청이 불채택되거나 기일 간격이 너무 짧아져 방어권 보장에 불리한 결과가 생기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재벌총수 등의 경우 1심에서 시간을 끌다가 구속기간이 다가오면 보석 신청을 하거나 직권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재판을 받곤 합니다.”(B 국선변호사)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이 22일 발간한 ‘법원의 구속기간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현직 판사 10명 중 9명은 현재의 ‘구속기간 제한’ 제도를 완화 및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피고인 구속기간에 제한이 없는 외국과 달리, 우리 형사소송법은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구속기간을 심급별로 6개월로 제한하고 있다. 피고인의 미결구금(판결 확정 때까지 구금) 장기화를 방지하기 위해 1954년 형소법 제정 당시 도입한 제도다.
제도를 고안한 당시와 달리 최근 쟁점이 복잡한 화이트칼라 범죄와 법리가 복잡한 직권남용 사건이 늘어나면서 ‘6개월 구속기간’에 쫓기는 판사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재판이 늘어지는 사이 석방된 피고인이 도주하는 일도 벌어진다. 1000억원대 횡령 혐의로 2020년 5월 구속기소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지난해 11월 1심 결심공판 직전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다 48일 만에 붙잡혔다.
‘공판중심주의’ 시행에 따라 심리가 장기화하면서 평균처리기간이 늘어난 점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같은 현실 속에 구속기간 제한 제도가 피고인의 증인·증거 신청 불채택 등 되레 피고인의 방어권을 약화하는 딜레마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770명의 법관 중 79.5%는 현행 구속기간 제한제도를 완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14.4%는 구속기간 제한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답해 10명 중 9명(93.9%)은 이 제도의 완화 또는 폐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설문에 대해 변호사(136명)들은 ‘현행 유지’(35.5%)를 가장 많이 선택했지만, 구속기간 제한제도의 완화 또는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합계 64.7%로 역시 더 많았다.

증거인멸 등의 우려가 높은 피고인을 구속 상태로 심리하기 위해 검찰의 ‘쪼개기 기소’ 구속영장을 발부해주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고인의 혐의를 쪼갠 뒤 추가 기소된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구속기간을 6개월 연장하는 방식이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사건에서 당초 배임 혐의로 구속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등이 지난해 구속 만료 직전 별도 혐의로 구속이 연장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윤선 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형사재판의 현실에 맞는 보다 유연한 구속기간 제한제도의 검토와 불구속재판 확대를 위한 구속대체제도 및 석방제도의 도입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일각에선 최근 몇 년 전부터 피의자, 피고인들에 대한 인권보호 조치로 불구속 재판이 확대되는 경향을 감안할 때 구속기한 연장은 이를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서초동의 한 중견 법관은 “피고인의 구속기한 제한 제도는 ‘신속한 재판’과 ‘충실한 재판’이라는 ‘양날의 칼’인 만큼 이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충실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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