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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에 멈춰있는 그곳… 시민들이 원하는 이태원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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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2-07 07:00:00 수정 : 2023-02-07 09: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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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대구 지하철 화재(2003년), 세월호 참사(2014년)까지. 한국사회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한 참사의 명칭 앞에는 주로 사고 장소나 지역명이 붙는다. 세월호 참사도 ‘팽목항’이나 ‘안산(단원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작 참사 ‘장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늘 부족했다.

 

논의의 부재 속에서 이태원은 2022년 10월29일, 압사 참사가 발생한 그날에 멈춰있다.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시민들은 죄책감을 느끼며 이태원을 기피하고 있다. 유가족이 원하는 추모 공간 설치나 상인이 바라는 이태원 상권 회복은 여전히 요원하다. 일각에서는 유가족과 상인을 갈등 구도로 묘사하고, 시민들은 양측 입장이 모두 이해된다며 난감해한다. 그렇게 이태원은 더 불편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째인 지난 5일 사고 현장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골목에 추모 메세지가 가득하다. 연합뉴스

직장인 김모(27)씨는 “너무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추모 공간을 붙잡고 있으면 계속 참사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유가족들의 슬픔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추모 공간 자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가 싶다”고 토로했다. 참사 이후로 이태원을 가지 않는다는 이호철(33)씨는 “이태원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며 “이태원에 간다면 굳이 그날 일을 얘기하지 않아도 참사에 대한 인식이 박혀 있어서 지인들과 만나 웃고 떠들기 꺼려질 것 같다”고 전했다.

 

세계일보는 이태원참사 유가족, 이태원 상인과 거주민 등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시민들을 만나 이태원이 어떤 장소가 돼야 할지에 대해 들어봤다. 이들의 목소리를 꿰어보니 “이태원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 돼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상인·유가족 “이태원, 사랑받는 장소 돼야”

 

‘이태원에 추모공간을 마련하려는 유가족 vs 이를 반대하는 상인’

 

참사 이후 추모공간 설치를 두고 항간에서는 이 같은 프레임을 만들어 유가족과 상인을 대척점에 놓았다. 유가족은 추모공간을 조성해 참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고, 상인들은 추모공간이 상권 회복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취재진이 만난 상인들 중에도 상권 침체를 이유로 이태원 내 추모공간 설치를 반대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이태원에서 20년 가까이 옷가게를 운영한 문모(65)씨는 “이태원에 추모공간을 설립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며 “이태원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관광객이 오길 꺼려할 것 같다”고 말했다. 추모공간이 이태원의 활력을 앗아갈 것이라는 의견이다.

 

지난 3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의 한 가게의 상인이 해밀톤호텔 가벽에 설치된 추모의벽 앞을 지나는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상인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우려가 제기됐다. 참사 이후 이태원 상권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이태원을 찾았다는 김민주(28)씨는 “기존 이태원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생기 있는 공간이었다. 추모 공간과는 대비되는 이미지”라며 “가시화된 조형물을 만들어 낙인을 찍기보다 개별적으로 자연스럽게 추모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유가족들도 이태원이 이전처럼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로 남길 바라기는 매한가지다.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거리가 이렇게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부대표는 “아이들이 좋아했던 곳이 슬럼가가 되고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태원에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피해자에게도 낙인이 찍힌다”면서 “이태원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상인들과 업무협약(MOU)도 체결했다”고 밝혔다.

 

상인과 유가족 모두 ‘이태원을 시민들이 사랑하는 공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셈이다. 참사로 동생을 잃은 최모(27)씨도 “이태원을 너무 나쁘게 기억하진 않았으면 한다. 이태원에 몰린 인파도 이태원이 좋아서 갔던 것”이라며 “코로나19에 이태원 참사까지 겹쳐 상인들도 힘든 것 같다. 참사가 상인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강조했다.

 

시민·유가족 합동분향소 조문 6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열린 ‘시청 분향소 철거 예고 규탄 기자회견’을 마친 뒤 유가족과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추모공간이 이태원 회복하는 방안”

 

시민들 사이에서는 추모공간이 오히려 이태원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태원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되찾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다”는 장모(26)씨도 “참사를 묻어두고 즐거운 곳으로만 부활시키는 게 더 안 좋아보일 것 같다”고 했다. 장씨는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에도 역사 안에 추모공간이 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참사를 기억할만한 조형물이나 공간을 만들어 달라진 이태원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듯 하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A(29)씨는 “사람들이 이태원을 기피하는 이유는 죽음의 현장이라는 공포와 미안함 때문인데, 그게 잊히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이태원의 이미지나 상권을 회복시킬 수 없다”며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출 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6일 서울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과 시민대책회의, 시민 등이 추모제를 엄수, 159배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태원을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끼는 공간으로 기억하는 김희선(27)씨는 “지금은 참사가 벌어진 곳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됐다”며 “희생자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오히려 죄책감을 덜고, 예전으로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어차피 그 공간을 지나가면 참사 기억이 떠오를텐데, 공식적인 추모가 더 상처를 회복하는 방법”이라며 “앞으로는 ‘잊지 않겠다. 되풀이 하지 않겠다’라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부대표는 “시간이 지나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야 그걸 본 아이들이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며 “근데 그 공간은 우울하기만 한 공간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 형태로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유가족 측과 상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참사가 발생한 골목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논의를 마친 상태다.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는 “유가족과 상인이 모여 참사가 발생한 골목을 ‘안전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었다”면서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하는 거리이고, 모두에게 안전한 거리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사이에 있는 ‘9·11 메모리얼 뮤지엄’은 미국 뉴욕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EPA연합뉴스

◆“추모공간은 일상 속 공간 돼야”

 

전문가들은 ‘추모공간’을 둘러싼 갈등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추모공간을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김민환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교수는 “추모공간이 일상공간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우울해지고 상권에 피해가 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해외에는 9·11 메모리얼 파크처럼 추모공간을 보러 가고 거기서 밥을 먹고 모여서 이야기하는 사례가 많다”며 “우리 사회가 일상 속 추모공간을 가져본 경험이 없으니 상상하지 못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추모공간을 상품백화점 위령탑처럼 외딴 곳에 두거나, 엄숙하게만 만들어버리면 추모공간이 예외적 시공간이 되어 뒤돌아서면 망각하게 된다”면서 “추모공간을 현실의 삶 바깥으로 밀어내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견딜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유사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다영 국가트라우마센터 담당관도 “우리 사회는 그동안 사회적 재난을 숨기려고 했다. 성수대교 참사 추모비도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 세웠는데, 추모 공간은 접근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우리가 희생자를 기억하고 있다’‘앞으로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보겠다’는 의미를 담은 추모는 희생자를 기리는 효과뿐만 아니라 생존자를 위로하는 효과도 있다”고 전했다.

 

세계일보는 이번 참사로 안타깝게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사회부 경찰팀=김선영·정지혜·박유빈·조희연·김나현·안경준·유경민·윤솔·윤준호·이규희·이민경·이예림·채명준·최우석·김계범·이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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