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를 정치범과 동일하게 취급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던 카리브해의 공산국가 쿠바에서 동성 간 결혼을 가능케 하는 법안이 통과돼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쿠바 정부에 따르면 쿠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6일(현지시간) 가족법 개정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개표가 94% 진행된 이날 오전 9시 현재 찬성이 66.87%(393만6790표), 반대가 33.13%(195만90표)로 각각 집계돼 이미 찬성이 유효표 과반을 획득했다고 밝혔다. 840만 유권자의 74.1%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새 가족법이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 쿠바에서는 성 소수자(LGBTQ) 커플도 결혼과 자녀 입양을 할 수 있게 됐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이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수년 동안 이 법을 기다려온 다양한 세대의 쿠바인에게 빚을 갚는 방법이었다”며 “오늘부로 우리는 더 나은 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다.
400개 이상 조항이 담겨 분량만 100쪽에 달하는 새 가족법은 ‘남성과 여성의 자발적 결합’이라고 규정했던 결혼의 기존 정의를 성별과 무관한 ‘두 사람의 자발적 결합’으로 변경했다. 이밖에 아동 권리 강화, 손자·손녀에 대한 조부모 권리 확대, 가정 내 폭력 처벌 등의 내용을 담았다. 대리모 출산도 허용되며, 부부가 가사를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권고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1975년 제정된 가족법을 개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는 전날 쿠바 전역에서 시행됐다.
CNN방송 등에 따르면 쿠바는 1959년 공산혁명 이후 동성애자들을 반체제 인사들처럼 재판 없이 강제노역형에 처하는 등 탄압해왔다. 1979년 동성애를 비범죄화했으나, 많은 성 소수자들은 여전히 공개적인 차별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야 성전환 수술이 허용되고 성적 지향에 따른 직장 내 차별이 철폐됐다.
쿠바는 2018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처음 인정하는 내용이 뼈대를 이룬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헌법을 고친 바 있다. 그때는 동성애 반대 여론이 투표율을 낮출 수 있다는 우려 속에 동성혼 합법화 조항을 뺐다. 이번에는 정부가 “새로운 가족법은 60년 이상 된 쿠바 혁명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증거”라며 여론을 주도적으로 조성했다.
일각에서는 쿠바 정부가 위기 모면을 위해 성 소수자 권리를 활용했다고 비판한다. 199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로 지난해 거센 반정부 시위의 물결이 휩쓸고 가자 ‘소수자 자유 확대’ 내용이 담긴 이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정치·사회적 불만을 달래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쿠바 관계 전문가인 알베르토 콜 미 드폴대 교수는 “이번 투표는 디아스카넬이 ‘이것 봐, 우리는 그렇게 억압적이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연구원들도 “성소수자 커플이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권리를 포함한 개인의 권리를 인기 투표에 부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가족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되기는 했지만, 쿠바에서 영향력이 큰 가톨릭교회와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이 반발하고 있어 법 개정 이후에도 진통이 예상된다. 각종 투표 찬성률이 90%를 넘기곤 하는 쿠바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번 가족법 개정안은 전폭적인 지지는 얻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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