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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 속 기억·감각… 산에 녹여낸 열정·환희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2-08-06 15:00:00 수정 : 2022-08-06 12: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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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지자요수 인자요산
도시 이미지 남기는 이희준
유학 이후 낯설게 느껴진 서울
사진으로 남겨 회화 작업 진행
다층 레이어·새로운 질감 통해
화면에 생동감까지 불어넣어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유영국
고향에서 보는 산과 노을 등 주제
단순화해 탁월한 색채 사용 눈길
자유분방한 붓의 움직임 보여줘
기하학적 추상·조형실험 절정에

얼마 전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는데 좋아하는 ‘논어’의 구절이 나왔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지자는 사리에 밝아 물처럼 동적으로 움직이며 인자는 고요히 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막 지나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시간은 사람을 어질게 만들기 마련이니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산이 좋아진다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래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오랜만에 이 구절을 만나니 두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다. 도시를 거닐며 본 풍경을 남기는 이희준(1988)과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며 산을 그린 유영국(1916∼2002)의 작품이다.

 

이희준, ‘A Shape of Taste no.37’(2022) 국제갤러리 제공

#유영하듯 걸으며 그려낸 그림

 

이희준은 일상 속 장면에서 추출한 이미지를 옮겨 담은 추상 회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조소과를 졸업했다. 이후 영국 글래스고 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갤러리, 레스빠스71, 이목화랑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아트선재센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뮤지엄 산, 세화미술관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9년 미술전문지 ‘퍼블릭 아트’가 주관하는 ‘뉴히어로’ 대상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신생 공간 ‘노토일렛’을 운영하며 다수의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일찍부터 건축과 공간 등 자기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관심은 유학 이후 귀국하며 구체적인 작업의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서울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고 실제로 연남동, 한남동 등은 급변하는 중이었다. 단독주택 단지였던 동네는 전시장과 카페가 즐비한 문화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들을 거닐며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사진으로 남겼다. 거기서 비롯하는 회화 작업을 진행했고 구상이 아니라 추상 화면을 구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추상이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의 범람 속에서 그림이 가진 매력을 알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A Shape of Taste’(2018~)는 이러한 내용을 반영한 이희준의 초기 연작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변화하는 도시를 거닐며 촬영한 사진 가운데 일부 이미지를 선별한다. 선별의 기준은 촬영 당시 작가의 시선과 감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이후 그는 이미지를 인쇄하고 그 위에 거기서 기인하는 수직, 수평 등이 기조를 이루는 드로잉을 한다. 드로잉은 캔버스 화면에 옮겨지고 칠하는 과정을 통해 선, 점, 그리고 색면으로 완성된다.

 

‘Image Architect’(2021~)는 기존 작업에 포토콜라주 기법을 기반 삼아 변화를 준 연작이다. 촬영한 사진을 부분 확대 또는 크롭 등의 편집을 거쳐 인쇄해 캔버스에 직접적으로 등장시킨다. 추상 회화에 녹아 있던 풍경의 기억과 감각은 이제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난다. 더해지는 다양한 색, 기하학적 도형은 단순한 추상화 과정을 넘어 회화의 건축적 기능까지 모색한다. 실제로 작가는 “회벽을 바르듯 화면 속 공간 위에 시공한다”고 작업 방식을 표현하기도 했다.

 

‘Salt, Palm, and Green’(2022)은 이러한 최근의 작업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가로 160㎝, 세로 160㎝에 달하는 대형 화면 안에는 하나의 풍경이 있다. 유리창에 비친 그 풍경은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국적인 장면이다. 유리창 위로는 곡선과 직선이 만든 형태들이 초록, 흰색 등의 색면으로 출현한다. 작업 과정에서 체득해 온 작가만의 색감과 리드미컬한 조형 감각이 아름다운 결과물로 나타난다. 색면 위에 남은 붓의 흔적은 특정 장소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다층의 레이어와 새로운 질감을 쌓아 보여준다. 무심히 떨어트린 물감과 번진 듯 남은 선의 흔적은 화면에 생동감까지 더한다. 야자수가 보이던 제주도 한 카페에서의 여유롭던 풍경이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순간이다.

 

유영국, ‘Work’(1969) 국제갤러리 제공

#산처럼 머무르며 그린 그림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로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추상화로 구현해냈다. 그는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작은 마을에서 자랐지만 지혜롭고 의로운 부모 아래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 속에서도 한글과 천자문을 접할 수 있었다. 울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이후 도쿄로 떠났다. 도쿄에서는 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했다. 김환기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들은 당시 모던 도시였던 도쿄에서도 전위적으로 여겨진 서구의 추상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미술 공부를 시작하고 3년째 되던 해에는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수상했다.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추상 미술을 하던 무라이 미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3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다. 돌아오자 경찰 감시가 시작했고 해방까지 그를 피해 바다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며 생계를 유지했다. 해방 이후 자유로워지는 듯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때는 양조장을 운영해 가족을 부양했다. 순탄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붓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고향에서 보는 산과 노을 등 자연의 모습을 단순화한 형태로 추상화하는 시도를 했다. 그 가운데서 마티에르를 살려 재질감을 드러내고 탁월한 색채 사용을 통한 조화도 이뤄냈다.

 

이희준, ‘Salt, Palm, and Green’(2022) 국제갤러리 제공

유영욱은 1963년 김환기와 함께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도쿄를 넘어서 세계의 미술 흐름을 접하고 온 그는 전업 작가로 삶을 새로 꾸렸다. 7평 남짓한 약수동 작업실에서 매일 2시부터 6시까지 작업하며 조형 실험을 계속했다. 1964년에는 첫 개인전을 신문회관에서 개최, 15점의 신작을 선보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전의 작업보다 자유분방한 붓의 움직임과 넘치는 에너지를 통해 장엄한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고향에서 보았던 산은 여기서 산맥과 같이 표현되며 노을빛도 타들어 가는 듯한 붉은색으로 나타난다.

 

전업 작가 생활을 지속하며 그는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고”라고 말했다. 기초 공부를 마친 뒤에 자연에 부드럽게 돌아간 그림들을 그리겠다고 했다. 서구의 것에서 시작한 추상은 이 과정을 통해 독립적으로 조형적 고민을 거치며 새로운 추상으로 태어났다. 작은 작업실에서 한결같은 태도로 쌓아 올린 산 같은 그 세계는 그래서 그만의 것이다.

 

‘Work’(1969)는 기하학적 추상과 조형 실험이 절정에 달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이 시기, 1960년대에 그려진 작품이다. 여기 정사각형의 화면 속에는 정사각형의 화면 윤곽 모양이 화면 내부에서 되풀이된다.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정사각형의 면들은 엇갈리기도 한다. 변주는 화면이 전형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으며 긴장을 자아낸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을 동반하며 깊어져 가는 화면은 짙은 녹색에서 시작해 푸른색으로 칠해진다. 햇살이 비추던 녹음 우거지던 모습이 밤을 거쳐 새벽의 푸른 시간으로 흐르는 듯하다. 모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삼각형의 산이다. 작가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했듯 그의 화면 안에 앉아있는 산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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