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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에서 공연계 거인 된 박명성 “가족·친지 일체 회사에 안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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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05 07:00:00 수정 : 2022-08-05 1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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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마을’ 해남 출신 촌놈은 광주로 유학을 간 고등학교 시절 차범석(1924∼2006, 극작가·연출가) 연극 ‘산불’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연극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다. 그렇게 어찌어찌하여 입대 전, 당대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김상열(1941~1998, 〃) 사단’에서 본격적으로 연극배우 꿈을 키웠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배우자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연출가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군 복무 기간 3년을 빼고 몇 년간 조연출로 극단 허드렛일을 도맡던 중 1989년 첫 연출 기회가 왔다. 당시 2년 전 서울 대학로에 극단 ‘신시(神市)’를 창단한 김 연출이 단원 워크숍 작품 연출을 맡긴 것이다.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인정받고, 잘하면 정식 연출로 데뷔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의욕적으로 최선을 다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선보였다. 결과는 김 연출 한마디로 정리됐다. “연출은 만만한 작업도,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야. 농사를 짓든지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어. 배우는 텄다 싶어서 연출을 시켰더니 그것도 젬병이군. 이걸 연극이라고 만들었어?”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어떻게든 연극판에 남고 싶었던 그는 김 연출을 찾아가 “기획자(프로듀서) 일을 하면 어떻겠냐”며 매달렸다. 이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제격인 일이다. 넌 훌륭한 기획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북돋워 준 김 연출의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촌놈은 ‘신시’ 대표였던 김 연출 작고 직후 극단을 책임지면서 국내 뮤지컬 발전과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중·대극장 연극 확대 등 공연문화 트렌드를 확 바꾼 선구자가 됐다. 박명성(60)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이야기다.

 

땅끝 마을 촌놈에서 연극·뮤지컬 공연계 거인이 된 그를 지난달 27일 만났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도심 사찰인 ‘구룡사’ 건너편 신시컴퍼니 사무실에서다. 한쪽 벽에 걸린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는 붓글씨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좌우명 ‘가장 낮은 곳에서 먼 꿈을 꾸는 사람’답게 스스로 거는 주문같았다. 신시컴퍼니가 6년 만에 국립극장 대극장(해오름)에 다시 올린 연극 ‘햄릿’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 달 일정으로 지난달 13일 시작한 ‘햄릿’은 출연진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16일부터 공연이 취소됐다가 인터뷰 전날 재개됐다.  

 

―한 달 동안 전회 매진돼도 제작비를 회수하기 쉽지 않다던데 타격이 크겠다.

 

“어쩔 수 없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환경 아닌가. 방금 전 손진책 선생님(‘햄릿’ 연출)과 통화했는데 ‘더블 캐스트를 할걸 그랬다’고 아쉬워하셔서 한말씀 드렸다. ‘더블 캐스트를 했으면 이렇게 완성도 높은 공연이 나왔을까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지금은 코로나19 상황이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원 캐스트’를 주장한다. 주요 배역마다 맡는 배우가 한 명(원 캐스트)인 것과 여러 명(더블·트리플 캐스트 등)인 경우 연습량과 작품 완성도 차이가 크게 나니까. 또 연극으로 수익이 나면 얼마나 나겠나. 그냥 훌륭한 선생님(대배우)들 모시고 좋은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지.”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국내 1세대 뮤지컬 제작자로서 ‘뮤지컬계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데 정작 본인은 ‘연극쟁이’를 입에 달고 산다. 연극판에 어떻게 발을 디뎠나.

 

“1962년(호적상으론 1963년) 전남 해남에서 농사 짓는 부모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농사 일도 돕고 논두렁 밭두렁 오가며 자랐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단체 관람을 가서 

 

본 차범석 선생님 ‘산불’에 감동해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서울예술대학에 가려 했지만 부모님 눈치에 전남대 상과대를 지원했고 낙방했다. 아무래도 은행원은 아닌 것 같아 상경해서 연기학원도 다니며 재수해 서울예대 연극과를 지원했지만 또 떨어졌다.”

 

“삼수 때는 ‘일단 입학한 뒤 연극과로 옮기자’는 생각으로 경쟁률 낮았던 서울예대 한국무용과(83학번)에 합격했다. 당시 숙소는 연구단원 생활을 하던 ‘극단 동인극장‘의 장충동 지하 소극장이었다. 극장에서 숙식하며 청소와 사무실 업무, 선배들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할 때 유망 배우였던 김갑수(65) 형을 만났다. 내가 극장에서 지내는 걸 알고 얹혀살던 형님 집을 나와 쳐들어온 것이다. 형에게 라면 끓여주고 양말 빨아주며 2년 넘게 같이 지냈다. 나를 단역이나마 무대에 처음 세워주고, 김상열 선생에게 소개해준 게 갑수 형이다. 그 덕에 내가 ‘신시’ 창단 멤버가 되고 프로듀서가 될 수 있었다.”    

 

-땅을 딛고 바다를 보며 살았던 유년 시절 경험이 오뚝이처럼 살아온 기질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지.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 산도 한 두 개 넘고 보통 2km 정도 되는 거리의 학교를 오가며 마주한 자연과 함께 감수성을 키운 것 같다. 농사짓는 집이라 사는 건 풍족하지 않았지만 매일 산과 바다를 보며 마음은 넉넉했다. 도시생활처럼 뭔가 서둘러서 하지 않아도 돼 정서적으로 풍요로웠다고 할까. 그래서 지금도 어려서 접했던 소박한 삶,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와 연극이 가슴에 와 닿는 편이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그토록 원했던 연극과 떨어지고 삼수 끝에 들어간 무용과는 다닐 만했나. 

 

“당시 무용과에 지원하는 남학생이 적어, ‘일단 입학해서 연극과로 옮겨야 되겠다’하고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전과를 안 했다. 한국 무용을 했는데 하다 보니 아주 재밌고 신세계가 열린 듯했다. 수업 시간이 어떻게 보면 몸을 사용한 놀이나 마찬가지여서. 시골에서 자라 그런지 몸도 유연했고. 그러다 전통 굿의 매력에 미쳐 전국 각 지역의 무형문화재 굿판을 쫓아다녔다. 굿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모노 드라마를 하는 거다. 굿은 풍자와 해학, 권선징악 등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종합예술의 극치여서 보면 볼수록 매력을 느꼈다. 그러다 군대 3년을 갖다 오니 몸이 굳어 버려서 무용은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됐다.”

 

―1989년 연출작 ‘동물농장’의 기억이 쓰라릴 듯한데.

 

“조연출 몇 년 했다고 연출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연출가는 연극적 지식과 예술적 소양은 물론 리더십과 배우 심리를 꿰뚫는 혜안 등 여러 가지를 갖춰야 하더라. 그래서 연출 잘하는 젊은 친구들 보면 천재라고 생각한다. 빨리 연출을 포기하고 다른 일(기획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 김상열 선생에게 감사해야지. 물론 그 당시는 기획자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그냥 극단 살림하는 총무였다. 제작·기획은 다 연출가가 하니까. 사실상 총무하면서 홍보 마케팅을 새롭게 시도하는 등 기획자로서 미개척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다. 총무 역할을 확대해서 극단 살림도 신경쓰지만 기획 아이디어를 내고 창의적인 마케팅 전략도 고민하고. 기획자로서 뭔가 하나라도 개발하면 최초의 시도가 되는 거여서 나름 재밌게 열정적으로 했다.”

 

극단 살림과 행정 업무를 총괄하며 홍보·마케팅 업무 등 연극 기획자로 일한 그는 1997년 뮤지컬 기획자로 변신한다. 국내 관객들이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최신 뮤지컬이 아니라 30∼40년 전 작품만 봐야 하는 게 못마땅해서다. 이는 국내 제작사들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채 브로드웨이 옛날 작품을 베껴 공연하는 ‘해적판’ 관행 탓이 컸다. 그는 다르게 해보려고 미국에 갔지만 한국 공연계 괘씸한 행태와 제작 능력을 불신한 브로드웨이 관계자에게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기어코 설득해 들여온 국내 최초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이 ‘더 라이프’다. 1998년 공연 당시 외환위기였음에도 크게 흥행했고, 이를 계기로 ‘신뢰할 만한 한국 프로듀서’로 이름이 알려져 ‘렌트’, ‘시카고’ 등 브로드웨이에서 인기절정인 작품들만 선별해 계약을 따냈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극단을 1999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다시 2009년 ‘신시컴퍼니’로 바꾼 이유는.

“연극, 뮤지컬, 마당극, 악극 등을 다 잘해낼 자신이 없었고, 뮤지컬이 머잖아 공연예술의 꽃이 될 거란 확신이 있어서 뮤지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제1회 차범석 희곡상(2007년) 작품인 ‘침향’을 맡아 2008년 공연하게 됐다. 나의 연극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보필하며 많은 조언을 구했던 차범석 선생께서 ‘다시 연극해라’고 주신 계시 같았다. 연극을 접고 뮤지컬만 쭉 하다 보니 ‘뭔가 해야 할 일을 다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역시 차범석 선생이 (하늘에서도) 그걸 아시고 명령한 것 같았다. 나도 평소 ‘연극과 뮤지컬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건강한 공연시장이 형성되고 문화강국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왔고….”

 

“왜냐하면 뮤지컬은 저만큼 앞서고 있는데 연극은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이렇게 막 질퍽거리고 있으면 건강한 공연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기초 순수 예술을 빼놓고는 뮤지컬 등 아무리 미래 지향적 분야의 문화 콘텐츠도 절대 앞서 나갈 수 없다. 연극·문학·전통·무용 같은 기초 순수 예술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해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한국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등 문화콘텐츠들이 세계를 제패하거나 세계 수준에 올라 있는 거다. 그런 측면에서 연극이 대단히 중요하다 봤고, 연극 잘하는 팀이 뮤지컬도 잘 하는 만큼 둘을 균형 있게 제작하기로 하고 사명에서 ‘뮤지컬’을 뺐다. 정부도 기초 순수 예술 분야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돼줘야 한다.”

 

그는 이후 회사 대표 자리와 뮤지컬 부문도 후배들에게 믿고 맡기며 연극 프로듀서 일에 주력하는 연극쟁이로 돌아왔다. 신시컴퍼니는 흥행 뮤지컬 작품 수익으로 많은 제작비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창작·실험적 뮤지컬, 대극장 연극을 꾸준히 올린다.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렌트’, ‘빌리 엘리어트’, ‘마틸다’ 등 흥행작도 많지만 모두 라이선스 뮤지컬이란 게 아쉽다.     

 

―쪽박 차고 빚더미에 앉게 한 작품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아픈 손가락은.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대표적인 창작 뮤지컬로 레퍼토리화하려고 했는데 안 돼 마음이 아프다. 제작비가 엄청난 뮤지컬은 (시즌제로) 계속 다시 해서 레퍼토리화했을 때 수익이 창출되는데, 재연 때 욕심을 내 너무 큰 극장(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려 실패했다. ‘갬블러’도 마찬가지고. ‘댄싱 섀도우’는 차범석 ‘산불’을 세계적 수준의 창작 뮤지컬로 만들려고 해외 최고 예술가들하고 협업했다가 오히려 우리 고유 토속적 정서를 희석하며 관객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만했던 결과여서 항상 반성한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흥행 참패로 집 전세금 털어 쓰고 신용카드도 정지된 초창기 시절 등 최악의 상황에 놓여도 긍정적 모습이 인상적이다.

 

“속이 없어서 그렇다.(웃음) 나만큼 대형 뮤지컬에서 성공해본 사람도, 많이 실패해 본 사람도 없을 거다. 같은 일을 하는 이상 언제든 더 큰 실패를 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비싼 수업료 내고 엄청난 공부 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성공과 실패에 이력이 났고 해남 촌놈답게 맷집 하나는 튼튼해졌는데 이것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잖나, 실패할 때마다 머리 싸매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면 자기 심신만 상하지.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람들이 외롭기도 하던데, 외롭지는 않은가. 

 

“외로울 게 별로 없다. 술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 좋아해서.(웃음)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공연계·관광업계 등 얼마나 어려웠나. 주변에서 다들 공연계 힘든 줄 아는데 내가 내색을 안 하니 (섭섭하단 투로) ‘야, 너는 왜 어렵다거나 도와달라는 얘기를 한번도 안 하냐’고 하더라. 그런데 난 체질적으로 남들한테 뭘 도와달라고 못하겠더라. 낯을 가린다고 할까. 자존심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못 난거지. 그런데 진짜 성격상, 남에게 베풀고 나누는 건 잘 하는데 내가 막 손 내미는 건 낯 뜨거워 잘 못한다.”

 

“사실 팬데믹 탓에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시는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한 경우 빼곤 팬데믹 기간 예정했던 공연을 하나도 취소 안 했다. 계획대로 다 오디션 하고 연습해 공연했다. 왜냐하면 (신시)컴퍼니 제작 스케줄은 함께 했던 배우, 스태프, 관객들과 약속이기도 해서다. 그 약속 때문에 우리는 한 작품도 미리 취소한 적 없고 공연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도 항상 준비를 계속했다. 공연하다가 중간에 막 내리는 경우도 있고, 연습 다 하고 막 올리기 전에 취소된 것도 있지만 연극(공연) 컴퍼니는 꾸준하게 연극(공연)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극장 연극은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부담이 상당할 텐데 많이 애착하는 것 같다.

 

“나는 연극을 잘 만드는 게 연극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남들이 엄두를 못 내는 대극장 연극을 하고 있지만 사실 민간 컴퍼니가 (제작비 부담을 떠안고) 대극장 연극 만들기 쉽지 않다. 그래도 대극장 연극이 활성화해야만 많은 대중한테 연극이 좋은 가치로 인식받는다. 하루에도 수백편 하는 소극장 연극은 너무 많은데 대극장 연극은 그렇지 않아 너무 귀하고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2년에 한 번은 대극장 연극을 꾸준히 올리려고 한다. 오랜만에 ‘햄릿’을 다시 올렸는데 내후년 쯤 어떤 작품을 할까 구상 중이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신시컴퍼니의 경영 철학은.

 

“좋은 작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자생력을 갖추는 것이다. 최고 작품성과 완성도로 승부를 거는 게 신시 경쟁력이다. 외부 투자와 특정 스타 캐스팅을 멀리하고, 공정한 오디션 과정을 거쳐 가급적 원 캐스트로 작품을 올리는 이유다.

 

우리는 (신시는 제작비가 엄청나 더 필요할 때 외부 투자자에게 손벌리기 보다) 차라리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자꾸 투자를 받으면 우리 경영 철학과 다르게 되니까. 투자자 그늘 밑에서 그 사람들이 하려는 대로 트리플·쿼드러플 캐스팅을 하면 절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그러면(그래서 흥행에도 실패하면) 다음에 투자도 못받아 자생력을 잃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신시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성공작인) ‘아이다’ 봤는지 모르겠지만 (초연 때부터) 스타가 누가 있었나.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정말 공정한 오디션 통해서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어 하고 잘 할 수 있는 배우들하고 같이 했을 때 탄탄한 앙상블이 생기고 팀 내에 문제도 안 생긴다. 정말 하고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다 모아지면 그야말로 산불처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온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할머니를 한 박정자(80) 선생님도 해외 오리지널팀 앞에서 오디션 보고 뽑혔다. 작품의 질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빌리 엘리어트’ 오리지널팀이 ‘전 세계 무대에서 할머니 역할 만큼은 한국이 최고다.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할머니 역할’이라고 인정한다. 박정자 선생님이 오디션까지 보고 맡았는데 안 그렇겠나.”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세대 교체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후배들이 잘 따라와 주고 있나. 박 프로듀서만큼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버거워 하는 것 아닌가. 

 

“신시만의 장점은 함께 일한 지 20년 넘는 스태프가 3분의 1이 넘는 등 대부분 10년 이상돼 자율적인 시스템이 정착됐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직원들하고 회의 자체도 자주 안 하고, 자율적으로 맡겨서 운영하게 한다. 작품 기획과 선정도 연극은 내가 하지만 뮤지컬은 후배들이 다 한다. 팀장 이상 스태프가 다 20년 넘게 일한 사람들이라 공동으로 창작·작업·운영·경영을 잘 하고 있다. 내가 일주일 자리를 비워도 ‘왜 사무실 안 나오냐’고 전화하는 사람도 없다.(웃음)

 

“내가 서른 여덟이란 젊은 나이에 신시 대표를 맡아서 어떻게 보면 관객들한테 신뢰를 얻는 컴퍼니를 만들려고 정말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모험했다. 그러면서 많은 실패와 성공을 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경영철학과 운영방향이 정립됐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컴퍼니가 지속적으로 가려면 내가 젊었을 때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후진들이 있어야 컴퍼니가 앞으로 30년 40년 50년 오래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족이나 친지를 일체 회사에 안 들인다.(관여 못하게 한다.) 작품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이 경영과 운영을 해야만 컴퍼니가 오래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듯하게 후진들한테 넘겨주는 컴퍼니의 본보기도 있어야 된다 생각해 왔고, 그 ‘1호’는 신시일 것이란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실제 후배들이 자율적으로 공동 운영을 잘 한다. 나보다 더 잘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보는 시각도 훨씬 감각적이고, 관객들이 뭘 요구하는지 빨리 포착한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도 순간 대처 능력이 나보다 빠르고 자기들이 다 해결한다. 어쨌든 젊은 사람들은 편법 쓰지 않고 정도로 한다. 정도의 길을 걷는 게 중요하잖아. 잘못된 거는 빨리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한국 뮤지컬 경쟁력은 어떤가.

 

“제작 시스템과 배우들은 세계적 수준인데 연출·극본·작곡·안무 등 콘텐츠 분야와 대형 무대 장치·조명·디자이너 등 기술 분야 인재층이 취약하다. 이런 문제가 좀 해결되고, 뮤지컬 전문 배우들을 스타로 육성하면 창작 뮤지컬도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다. 더는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해선 안 되는 시대다. 이 때문에라도 뮤지컬 전문 배우들이 더 대우받고 존중받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신시는 오디션을 통과하지 않는 스타가 필요없다. 무명이든 신인이든 공정한 오디션을 거쳐 신시 작품을 통해 스타가 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야 뮤지컬의 미래와 발전에 도움이 된다. 오디션을 통과하면 얼마든지 동등하게 작업하는 시스템이 신시에 정착돼 있다. 그(공정한 오디션을 통해 전문 배우 역량을 높이고 대우해준) 다음에 새로운 형식의 역발상과 괴짜 근성으로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형식의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많은 노하우가 쌓이고 이를 통해 창작 뮤지컬이 발전하고 대극장도 섭렵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이런 작품은 실패를 해도 괜찮다. 그런 역발상으로 좋은 기획안을 제안한다면 내가 얼마든지 프로듀서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나와 (기획안을 제안한) 젊은 예술가 모두 (작품 흥행에) 실패해도 좋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노하우를 배우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관객들 입맛에 맞는 로맨틱 코미디만 하거나 남들도 다 만들 수 있는 걸 인력과 공력, 돈을 들여 뭐하러 하느냐. 남들이 엄두를 못 내거나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런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마틸다’, ‘빌리 엘리어트’ 같은 어린이·가족 뮤지컬 대작을 올린 것도 비슷한 맥락인가. 성공할지 불확실하지만 제작한 배경이. 

 

“두 작품은 메시지도 훌륭했지만 제작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에 작품 그 자체로 승부한다는 우리 신시하고 딱 맞아떨어졌다. (작품 성격상)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니까 무슨 (티켓파워 있는) 스타도 안 나오고. 그냥 오디션 거쳐 (2년 가까이) 훈련시켜 작품을 만드는 거다. 마라톤과 같은 긴 호흡을 갖지 않으면 정말 제작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완전 미지에서 하는 그런 작업들이 재미있더라. 사실 연극도 그런 작품들을 하려고 한다. ”

 

“해외에서도 연극과 뮤지컬을 균형 있게 만드는 신시 제작 시스템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제작 과정이 힘든 라이선스 대작 뮤지컬은 돈만 많다고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다. 런던(웨스트엔드)이나 뉴욕(브로드웨이)에서 신시를 특히 알아주는 건 아무리 제작과정이 험난한 작품도 ‘신시는 연극을 했고 뮤지컬과 병행하는 컴퍼니라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다. 그래서 우리가 따온 라이선스 명작들이 많다. 해외 프로듀서들도 만나 보면 신시의 가장 큰 장점은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지금 런던에서 히트하고 있는 연극 하나도 내년 한국 공연을 준비 중이다.”

 

-‘햄릿’에서 보듯 원로 연극인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하던데. 한결같은 모습으로. 

 

“어른들을 진정성 있게 모시는 게 물론 쉽지 않지만 그분들이 있어 허투루 작품을 만들 수 없고, 나도 정신적으로 뭔가 풍요로워지는 것들을 많이 배운다. 이 시대 어느 분야든지 어른 역할이 중요하고 어른을 모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연극판에서도 젊은 친구들은 어른들 모시고 작업하면 불편하니까 노인 역할도 젊은 사람 분장시켜서 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노인 역할에 어울리는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을 캐스팅하면 그 한 작품에서만 도움받는 게 아니고 연극 인생과 삶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분들의 선지식과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 나 역시 연극계 어른들을 공경하고 가깝게 모시면서 손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꼰대들’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멀리할게 아니라 어른들이 삶의 노하우 등을 후진들에게 전수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하도록 포용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배우 김갑수 외에 고 김상열·차범석 선생, 구룡사 주지 정우스님을 특히 ‘연극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라고 했는데.

 

“김상열 선생은 공연현장에서 제작자와 예술가로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다. 어떤 얘기로 관객들을 만나고 어떤 자세로 관객을 대해야 하는지 배웠다. 차범석 선생은 연극에 발을 딛도록 해주고 연극정신을 갖게 해주신 분이다. 연극판에 들어와 선생을 만난 이후에도 항상 ‘연극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며 특히 내게 ‘돈을 만지는 사람이니 절대 돈 실수를 해선 안 된다’고 정신적으로 깨우쳐 주셨다. 돈 실수를 하면 수십 년 쌓아 올린 거 한번에 다 망가진다면서. 팩스가 없었을 때라 오래 전부터 선생 원고 심부름도 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나의 연극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잡아 주셨다. (김상열 선생과 소극장 뮤지컬 ‘님의 침묵’할 때 알게 된) 정우스님은 이후 든든한 후원자였고, 극단 신시를 있게 하신 분이다. 극단이 어려울 때 (구룡사에 소극장 마련 등) 후원도 많이 해주시고, 두 분 선생님 작고 하신 후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큰 버팀목이 돼주신 은인이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2022.07.27/허정호 선임기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우리 관객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창작 뮤지컬 한두 편 만들고 은퇴하는 게 꿈이다. 그래야 편하게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뭘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라이선스 뮤지컬이야 누구나 성공하는 사람 많고, 결국은 우리 창작 뮤지컬로 정말 대박 콘텐츠를 만들어 놔야 ‘아 내가 그래도 40년 넘게 공연하면서 해야 할 역할을 했구나’란 만족감이 들 것 같다. 외국(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진출하지는 못하더라도 국내에서라도 우리 관객들이 공감하고 크게 감동할 수 있는 창작 뮤지컬 한 두 개를 만들고 싶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1962년 해남 출생 ●광주 서석고·서울예술대학 한국무용과 졸업, 단국대 연극영화 학사·대중예술 석사 ●1987년 극단 ‘신시’ 창립단원 ●1999∼2011년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이사 ●2004∼2006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 ●2007∼2009년 서울연극협회 회장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폐회식 총감독 ●2015~2016년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 ●2012년 옥관문화훈장 ●2014년 제24회 이해랑 연극상

이강은 선임기자,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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