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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적용 최소화" 소수의견 낸 배만운 前 대법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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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17 11:30:00 수정 : 2022-05-31 17:52:23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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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중요"… 이회창과 나란히 반대
퇴임 후 모교 전남대 로스쿨에서 후진 양성
1994년 7월 9일 배만운 전 대법관을 비롯한 대법관 6명의 퇴임 기념촬영 모습. 앞줄 왼쪽부터 윤영철, 안우만, 김상원 대법관, 윤관 당시 대법원장, 배만운, 김주한, 김용준 대법관. 세계일보 자료사진

노태우정부 시절 ‘표현의 자유’를 들어 국가보안법의 지나친 확대 적용에 반대한 배만운 전 대법관이 지난 15일 타계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향년 88세.

 

193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명문 광주고, 전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7년 고등고시 9회 사법과에 합격함으로써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체장애를 딛고 대법관에 오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 고인의 고시 동기생이다. 

 

군법무관 복무를 마치고 1962년 광주지법 판사로 임용된 고인은 서울고법 부장판사, 광주·대전지법원장 등을 거쳐 사법연수원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 7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고향을 관할하는 광주지법의 법원장만 5년을 지내는 등 대법관이 될 때까지 26년간의 판사 생활 중 무려 17년을 광주에서 근무해 ‘호남 법통을 잇는 법조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고인이 대법관에 발탁됐을 때 언론매체들이 내놓은 프로필 기사를 보면 “취미로 등산을 즐기는 독실한 불교 신자”, “차분하고 조용한 인품”, “판결과 업무 처리에 빈틈이 없다” 등 평가가 많다. 한 신문은 고인을 “사건의 경중을 따지기 전에 모든 사건이 다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재판에 임하는 원칙주의자”라고 규정했다.

 

고(故) 배만운 전 대법관. 세계일보 자료사진

1994년 7월까지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고인은 유독 굵직한 형사사건들 상고심의 주심으로 판결문에 이름을 남겼다. 1989년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각종 불법사건으로 기소된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장 상고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990년 정부 몰래 북한 평양을 방문한 대학생 임수경씨(전 국회의원) 상고심에서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992년에는 상습사기 혐의로 기소된 유병언 당시 세모그룹 사장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임기만료로 퇴임하기 직전인 1994년 3월에는 상지대 재단비리 사건으로 기소된 김문기 전 국회의원 상고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하지만 고인을 유명하게 만든 건 이런 형사사건들이 아니고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낸 소수의견이었다. 어느 대기업에 다니던 노조원이 ‘임금의 기초이론’이란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보법상 고무·찬양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해당 책에 ‘임금인상 투쟁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구절이 담겨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199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으나 고인은 이회창 당시 대법관과 나란히 소수의견을 냈다. 이들은 반대의견에서 “표현물이 지닌 상징적 위험성만으로 불법행위로 단정해선 안된다”며 “국보법상 고무·찬양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고인은 “당시 국보법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소수의견에 가담한 이유를 설명했다.

 

법복을 벗은 뒤로는 평범한 변호사로 활동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생겨난 뒤 2009년 모교인 전남대 로스쿨 객원교수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7년 전남대 총동창회는 고인에게 ‘용봉인 영예대상’을 수여했다. 유족으로 아들 배광국 서울고법 부장판사(전 서울서부지법원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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