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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우크라 전쟁도 막지 못해… ‘안보리 무용론’ 재부상 [심층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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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4-30 22:00:00 수정 : 2022-04-30 23: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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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구실 못하는 유엔

반복되는 강대국 중심주의

1936년 伊의 에티오피아 침략 눈감아
英·佛, 자국 이익 좇아 무솔리니 인정
약소 국가들의 식민지 전락 고통 외면
86년 지난 현재 러, 우크라 침공 되풀이

거부권 제한 등 개혁안 논의

P5 거부권 행사 이후 총회 설명 의무화
2년 전 발의안, 우크라전 계기로 급물살
준상임이사국 신설 등 대안 함께 모색
美 언론 “새 기구 안 나오면 개혁 어려워”

상임이사국 침략 속수무책

세계대전 비극 막으려 만든 국제기구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비토권 부여
우크라 침공 규탄 결의안 만들었지만
전쟁 당사자 러, 비토권으로 무산시켜
유엔 안보리. AP연합뉴스

“침략자는 무고한 시민을 독가스로 죽이고 국가를 말살하려 합니다. 무기도 자원도 없는 우리는 오직 국제연맹의 약속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1936년 6월30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장.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비장한 표정으로 국제사회를 향해 8개월 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조국의 실상을 전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침략뿐 아니라 집단 안보와 연맹의 존재 의의, 국제조약에 대한 신뢰가 걸린 문제다. 오늘은 우리지만 내일은 당신의 나라일 수 있다”고 도움을 호소했지만 냉혹한 국익 논리 속에서 식민지 신세를 피하지 못했다.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가 독일 나치 정권의 군비확장을 공동으로 막자는 제안을 받아 이탈리아를 우호국으로 인식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사태 개입에 미온적이었다.

◆젤렌스키 86년 전 외침 재연

역사는 반복되는가. 셀라시에 연설 후 86년이 흐른 지난 5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 러시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으로 등장해 침략자를 규탄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특히 안보리의 무기력증을 격렬히 비판했다. “러시아군은 오직 재미로 자동차 안에 있던 민간인들을 탱크로 깔아뭉개고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었다”며 “안보리는 있지만, 안보리가 보장하는 안보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5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화상으로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주장하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유엔에 대한 비판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미 예고된 전쟁에도 유엔은 아무런 역할을 못 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안보리는 이 전쟁을 막고 종식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데 실패했다”며 “이 실패는 거대한 실망과 좌절, 분노의 원천이 됐다”고 지적했다.

유엔에 대한 비판의 중심에는 안보리 문제가 있으며, 그 핵심은 5개 상임이사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이 보유한 거부권(비토)이다.

◆‘예고된 전쟁’도 막지 못하는 유엔

유엔은 인류가 겪은 대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다.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1945년 창립 당시 51개국에 불과하던 유엔 회원국 수도 현재 193개국으로 늘어 대만 등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가 가입한 상태다.

에티오피아 황제의 호소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1936년 6월30일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 총회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제사회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회원국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안보리다. 안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구성된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다. 5개 상임이사국은 유엔 헌장에 따라 임기가 영구적이라는 뜻에서 P5(Permanent Five)로도 불린다. 각 대륙을 대표하는 비상임이사국의 임기는 2년으로 매년 5개국이 교체된다.

안보리는 각국의 ‘힘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핵심이 거부권이다. 상임이사국은 유엔 헌장 규정에 따라 안보리가 채택할 수 있는 조치 중 구속력이 가장 높은 결의(Resolution)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전체 이사국 3분의 2(9개국) 이상이 찬성하더라도 P5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안건은 통과될 수 없다. 유엔에서 만국(萬國)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하루 만인 지난 2월25일 열린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러시아의 공격 중단과 병력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결의는 결국 미국의 주도로 열린 유엔 총회 긴급특별회에서 채택됐으나 구속력은 없다.

비정부기구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의 리처드 가우언 유엔 전문가는 AFP통신에 “안보리는 결코 이 위기를 풀지 못한다”며 “러시아가 거부권을 갖고 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제사회 의견이나 외교적 해법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지난 24일(현지시간)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기를 단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탱크가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마리우폴=타스연합뉴스

◆강대국 거부권 남용… 러시아 143번 최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할 때도 안보리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2011년 내전이 발생한 시리아의 친러 정부 측에 불리한 결의안에 대해서도 15차례나 비토 했다.

사실 러시아 외에도 P5 국가는 모두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했다. 러시아가 143차례로 가장 많고 미국도 86회나 된다. 이어 영국(30회), 중국(18회), 프랑스(18회) 순이다.

미·소 냉전 시대에 이어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거부권 행사도 미국·영국·프랑스 대 중국·러시아의 진영 대립 양상을 보인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미국의 제재 결의 채택 입장에 중·러는 반대했다. 지난해 2월 발생한 군부 쿠데타 이후 수천 명의 시민이 희생된 미얀마 사태에 대해서도 제재를 요구한 미국 등 서방과 그를 반대한 중·러의 대립으로 강제성이 없는 의장 성명이 채택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타스연합뉴스

미국도 무력 충돌을 벌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지난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미국은 “외교적 채널로 갈등 해결에 나서고 있다”는 이유를 들며 의장 성명 발표도 네 차례나 거부했다.

◆거부권 개혁 필요성 높으나 실현 불투명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엔 개혁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은 지난달 온라인으로 열린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에서 “유엔 개혁을 조속히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엔에서는 지난 26일 변화를 향한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P5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열흘 내 공식 총회를 소집해 비토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이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러시아의 포격을 맞고 파괴된 우크라이나 이르핀의 한 아파트에서 시민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 연합뉴스

이 결의는 크리스티안 베나베저 주유엔 리히텐슈타인 대사가 주도해 2년 전 발의됐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물살을 탔다. 그는 “국제 평화와 안보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이런 사안에 대해 안보리 이사국이 아니거나 비토권을 갖지 않은 회원국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결의”라고 말했다.

현재 유엔 개혁과 관련해서는 거부권이 없는 준(準)상임이사국을 두자거나, 상임이사국·비상임이사국 수를 늘리자는 등 여러 안이 나오고 있다. 안보리 구성이 확대되면 거부권 행사의 심리적 장벽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독일, 인도, 브라질, 일본 4개국은 상임이사국을 6개국, 비상임이사국을 4, 5국 늘리되 새로운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15년간 동결하자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한국, 이탈리아, 멕시코 등 컨센서스 그룹(Uniting For Consensus)은 상임이사국 확대엔 반대하고 비상임이사국을 늘리자는 입장이다. 4대 범죄(집단학살·전쟁범죄·인종청소·반인륜범죄)에 대해선 거부권을 제한하자는 방안도 지속해서 제기돼 왔다.

안보리 개혁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나라가 적지 않지만 실현이 쉽지는 않다. 거부권을 없애거나 제한하려면 유엔 헌장을 바꿔야 하는데 이는 P5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1·2차 세계대전 이후 각각 국제연맹과 유엔이 설립된 것처럼 유엔을 대체할 새로운 기구가 나오지 않는다면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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