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앞에만 서면 작아진 獨… ‘전범국 죄책감’
"에너지 위기 해결과 연립정부 유지가 관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연합(EU)의 리더를 자처해 온 독일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에너지 자원 대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살인자’라고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 그리고 나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군을 살해할 무기를 제공하는 것도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유럽 대륙과 갈라선 섬나라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미국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군사원조 및 대(對)러시아 경제제재를 주도하며 유럽의 지도자 자리를 독일로부터 빼앗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깜짝 방문한 존슨 총리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반면 “키이우에 가겠다”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의 제안은 차갑게 거절당한 현실이 오늘날 독일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러 앞에만 서면 작아진 獨… ‘전범국 죄책감’
“올라프 숄츠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독일의 평화주의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뒤집어야 한다.” 영국 BBC 방송이 17일(현지시간)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한 독일의 난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독일이 직면한 딜레마의 근본 원인을 ‘죄책감’에서 찾아 눈길을 끈다.
BBC에 따르면 독일은 히틀러, 그리고 나치가 집권하던 1941년 6월 소련(현 러시아)을 침공한 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갖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반성해왔다. 2차대전의 일부인 독·소 전쟁은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긴 했으나 4년 남짓한 기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2700만명 이상의 소련인이 독일군에 죽임을 당했다. 독일은 이를 역사의 부채로 여겨 전후 소련, 그리고 그 후신인 러시아를 상대로 ‘저자세’ 외교를 펼쳐왔다는 것이 BBC의 분석이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6년간 이어진 앙겔라 메르켈 총리 임기 동안 독일의 대러시아 유화정책은 최고조에 달했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했고 특히 가스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도 개통했다. 미국이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해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메르켈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가스관 건설을 밀어붙였다. 메르켈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에 반대하는 한편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크름(크림)반도를 강탈했을 때에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최근 키이우 인근 부차에서 민간인 수백명이 러시아군에 학살된 정황이 드러난 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니아 대통령이 “메르켈을 초청해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독설을 내뱉은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에너지 위기 해결과 연립정부 유지가 관건"
BBC는 독일 내부에서 “이제 그만 러시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던질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점에 주목했다. 러시아와의 경제적 관계를 단절하고 그간 ‘전범국’이란 오명 탓에 주저해 온 각종 살상무기의 우크라이나 제공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차츰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부응해 숄츠 총리는 최근 의회 연설에서 국방예산을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중화기를 비롯해 고성능 무기도 우크라이나에 주겠다는 입장이다. 2차대전 당시 러시아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막강’ 독일군의 부활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독일이 유럽의 리더 자리를 되찾으려면 먼저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BBC는 지적했다. 첫번째는 에너지 다변화다. 러시아에 의존해 온 원유와 천연가스의 공급이 끊어진다는 전제 아래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간단치 않다. 자칫 독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
둘째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모두의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당장 녹색당은 우크라이나에 동정적이고 러시아에 적대적인 반면 숄츠 총리가 속한 사민당에는 여전히 친(親)러시아 성향의 정치인들이 제법 있다. BBC는 “숄츠 총리가 강력한 반(反)러시아 정책을 밀어붙이는 경우 당내 지지를 잃고 자칫 연립정부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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