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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후보작 '저주토끼' 정보라 “복수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외로우며”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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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4-15 07:30:00 수정 : 2022-04-18 11: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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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가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환상호러 웹진 『거울』에서 정도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2015년 말, 동양 전통의 12지신 가운데 한 동물을 정해서 각자가 소설 한편씩을 쓰는 특집을 하자고 했다. 개나 돼지, 용, 호랑이 등 멋있거나 익숙한 동물은 거의 선택이 끝났고, 그에게 남은 건 양과 토끼뿐이었다.

 

“양은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토끼를 선택했지요. 토끼는 동물 중에서 거의 최약체여서 무기가 될 것이 없더라고요. 예쁘고 귀여운 동물이어서 반대로 최대한 무섭게 만들자고 생각했죠.”

 

그리하여 토끼를 소재로 하되, 과거 쓰레기 만두 파동으로 억울하게 파산한 회사 이야기와, 군사독재 시절 쌀 자급자족을 위해 쌀로 전통주를 빚는 양조장의 맥이 끊길 뻔한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써내려갔다.

 

정보라(46)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아작) 표제작 이야기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억울하게 몰락한 친구의 원한을 갚기 위해 대대로 저주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저주토끼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저주토끼는 손자를 시작으로 원수 삼대를 몰락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속담처럼 할아버지에게 화가 몰려오는데....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34쪽)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6편)에 오른 『저주토끼』는 표제작을 비롯해 저주와 복수에 관한 환상호러 이야기들을 모아 2017년 출간된 소설집이다. 유럽과 아시아, 남미까지 15개국에 판권이 팔렸거나 판매가 논의 중이다. 부커상 재단은 소설집에 대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사용해, 현대 사회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다룬다”고 소개했다. 수상작 발표일은 5월 26일.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심에 오른 『저주토끼』는 무슨 이야기들을 어떻게 담고 있을까. 정보라 작가가 그동안 어떤 작품을 써왔고,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정 작가를 14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의 번역자 안톤 허(본명 허정범)씨와 함께 만났다. 모두에 “살려 달라, 평생 처음 주목을 받아서 얼떨떨하다”고 말했지만, 그의 답변은 시종일관 진솔했고 사이사이 유머도 담고 있었다.

 

소설집 속의 단편 「흉터」는 주술과 잘못된 믿음에 마음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에 의해 괴물의 제물이 됐다가 간난신고 끝에 탈출해 괴물과 맞섰던 한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 비범한 작품이다. 주술과 환상이 빚어낸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사는 마을의 모습은 아직도 여전히 주술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에 대한 풍자이자 아이러니로 읽힌다.

 

소설집 '저주 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합당한 결말이라 해도, 그는 밀려오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의 주술과 환상과 잘못된 믿음에 빼앗겨 버린 어린 시절, 매일이 생사의 기로였으나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져 버린 그때의 오랜 고통과 절망을 애도하며 그는 폐허가 된 마을에 멈추어 서서 울었다.”(229쪽)

 

―「흉터」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고 나면 공주와 더불어서 행복하게 산다는데, 과연 과거의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사라질까. 트라우마나 기억을 부각시킬 방식으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으로 썼다. 다른 독자들이 힘들었다고 하더라.”

 

부커상 심사위원장도 「흉터」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짜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너무 무서워서 소름이 돋았다. 사실 이런 일은 오늘날 한국사회든 외국이든 매일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트위터에 적었다고, 변역자 안톤 허가 전했다.

 

소설집에는 「저주토끼」와 「흉터」 외에도 덫에 걸린 여우를 풀어주지 않고 잔인하게 이용해서 돈을 벌다가 자신은 물론 아내, 자녀들까지 파괴시킨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덫」, 변기 안에서 배설물과 오물로 빚어진 피조물이 튀어나와서 급기야 주인이 되는 1998년 연세문학상 수상작 「머리」 등 10편이 담겨 있다.

 

―왜 「작가의 말」에서 ‘세상은 쓸쓸하다’고 했는지.

 

“세상의 불의나 부정을 저주해 나쁜 사람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생존자들이 그때 겪은 기억이나 감정을 싹 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도 어느 정도 불의하고 부조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설집 끝의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실제 작품 쓸 때의 마음도 그랬나.

 

“별로 쓸쓸하거나 순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상태와 비슷했다.”

 

―소설들의 발상이 참신한데,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는가.

 

“사실 제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은 얘기는 화장실에 가면 뭔가 나올까봐 걱정된다는 거였다. 그렇게 보면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다. 제 작품을 읽고 변비가 생기신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웃음) 일상 속 장면, 사물, 인물에서 출발해서 거기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인물의 경우 장면이나 정황을 그대로 쓰면 그대로 쓰면 모욕이나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 동의도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이야기는 최대한 비현실적으로, 현실 상황의 논리와 반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작품 번역 과정에서 협력하거나 에피소드가 있는지.

 

“저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능력 있는 분이고, 『저주토끼』 외에도 제 단편들을 번역해서 해외 웹진에 발표해준 적 있다. 제 의도를 정확히 알고 표현해 줬다. 처음부터 결과도 믿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웃음)”

 

―부커상 재단은 소설집에 대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사용해, 현대 사회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다룬다”고 평가했는데.

 

“쓸 때는 나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썼다. 부커상 재단에서 높이 평가해서 감동했다. 위대한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제가 쓴 이야기를 모야서 기획해 내준 것으로, 공통적인 주제를 뽑아서 낸 것은 아작 출판사의 공이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보라는 1998년 연세문화상에 단편 「머리」가 당선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예일대 러시아동유럽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 슬라브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동안 대학에서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학 등을 가르쳤고, 유럽권 문학작품을 번역해 왔다.

 

―어떻게 문학의 숲에 들어왔고, 작가가 됐는가.

 

“문학이 재미있었다. 미국의 에스에프 작가 어슐러 K. 르 귄이 SF 작가가 된 이유를 SF잡지가 원고료를 가장 많이 줬기 때문이라고 말하더라. (웃음) 대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운영하는 문학상(연세문학상)이 있는데, 당선되면 100만원을 준다고 해서, 돈을 벌고 싶어서 쓰게 됐다.”

 

―웹진 등에서 정도경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학생들이 제 소설을 읽으면 챙피해 그랬다. 학생들이 제 앞에서 소설을 읽어 죽고 싶었다. 필명을 다르게 했다. 그런데 책날개에서 (필명을) 알려서 아무 쓸모없게 됐다.”

 

환상호러 SF소설을 주로 써온 그는 장편소설 『문이 열렸다』(2010), 『죽은 자의 꿈』(2012), 『붉은 칼』(2019) 등을, 소설집 『저주토끼』 (2017), 『그녀를 만나다』(2021) 등을 펴냈다. 번역서로는 『탐욕』(2022),『광인과 수녀/쇠물닭/폭주 기관차』(2022), 『스타니스와프 렘: 미래학 학회 외 14편』(2021), 『그림자로부터의 탈출』(2019), 『안드로메다 성운』(2017) 등이 있다. 디지털문학상 우수상, SF어워드 우수상 등을 수상했고,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선정됐다.

 

―작품 세계를 조금 이야기해 준다면.

 

“『저주토끼』는 작품 중에서 환상성이 많은 것을 모은 것이다. 반면 『그녀를 만나다』의 표제작은 사회비판적이지만, 다른 작품은 에스에프로 좀비 소설, 러브 스토리도 있다. 과학기술적 이론이 나온 것을 내보자고 해서 냈다. 기획의도가 달라서 책이 다른 것이다. 『붉은 칼』은 한국과 러시아의 첫 접촉으로, 조선이 청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선전쟁에서 신유 장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조선인의 자부심이 있는데, 그것을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딴 얘기가 됐다.”

 

―러시아와 동유럽 문학을 공부하고 관련 작품을 번역해온 게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까.

 

“슬라브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로움, 환상성에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 소비에트 빨갱이 소설을 전공했다. 러시아 혁명 바로 직후부터 스탈린의 폭압 전까지, 혁명 직후여서 예술 실험이 허용되고 국가적으로 장려되던 시기였다. 스탈린주의 혁명 직후부터 10년간은 예술 등이 자유롭게 꽃 피던 시기였다. 그런 자유로움, 예술적 시도, 엉뚱한 상상력이나 창의적인 발상 같은 게 너무 좋았다. 유학하면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한국어 문장도 러시아어에 맞게 쓴다. 편집자도 이상하다고 하더라.”

 

―작가나 작품의 정체성에 여성주의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제가 여성이니까 여성주의가 안들어갈 리가 없다. 단편 「머리」는 그렇게 썼는데, 대학문학상을 받고 보니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 싶었다. 제가 별 주목받는 작가가 아니라서 이후로도 마음대로 썼다. 제가 여성이어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쓸 수밖에 없다.”

 

정 작가는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쓰기 전략으로 “결말이 떠오르면 첫 문장을 찾는다. 그 사이를 채운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상황과 반대로 생각해보기나 논문 읽기, 잘 쓰는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번역하는 작업도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이세아, 2022.4.14, 「‘싸우는 소설가’ 정보라, ‘저주토끼’로 세계를 홀리다」, 『여성신문』,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했는데.

 

“세상에 분쟁 지역이 26곳이라고 하더라. 고통과 상실이 널려 있지만, 일 더하기 이 식으로 해서 당장 소설로 나오진 못할 것 같다. 좀더 시간이 보내며 생각해보고 피해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소설집 '저주 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은.

 

“쓰고 싶은 이야기는 굉장히 많다. 소수자와 고통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은데, 그런 것만 쓰면 독자들이 읽으시기 힘드니까, 지금은 해양 수산물 시리즈를 쓰고 있다. 제가 포항 남자를 만나 재작년에 포항으로 시집을 갔는데 제사상에 올라오는 저만한 문어가 충격이었다. 문어는 썼고, 상어·멸치·김 이런 거를 쓸 예정이다. 몇 가지 엔솔로지 작품집에 참가할 예정이고, 아작 출판사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을 죽인 것만 고른 페미니즘 판타지도 낼 예정이다.”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외에 할 말이 없다. 화장실에 가셔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웃음)”

 

한편, 정 작가의 이번 소설집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안톤 허씨는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나라 장르 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증거인 것 같다”고 부커상 최종 후보 선정의 의미를 강조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작가와 번역가 모두에게 상이 수여된다. 상금 또한 작가와 번역가가 절반씩 나눠 갖게 된다. 허 번역가는 정보라의 작품 외에도 신경숙, 박상영 등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왔다.

 

허 번역가는 “『저주토끼』가 다방면에서 잘될 책”이라며 “문학성, 그 중에서도 문장의 아름다움에 반해 번역을 먼저 제안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SF(과학소설)가 돈을 많이 벌고 인기 있는 장르이고 우리나라에서도 SF 작가가 많은데 왜 번역된 SF문학은 안 나올까 그게 이상했다”며 “『저주토끼』가 성공한 건 신기한 일은 아니다”고도 했다.

 

그는 “문체의 전달력, 아이러니, 상상력이 정 작가의 문학성”이라며 “읽자마자 영미권에서 통할 것 같았다.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데 누가 그런 얘기를 싫어하겠는가. 이 책의 판권을 산 영국 혼포드스타는 크게 될 책이라며 누가 낚아챌 수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더라”고 전했다.

 

허 번역가는 “정 작가는 아이비리그를 나왔고 번역하기 귀찮아서 그렇지,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다. 번역자로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모든 번역을 받아줘서 역자로서 신나게 번역했다.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도 전에 리뷰 사이트에서 5점 만점에 4점, 5점 평가가 많아 다들 읽으면 이 책을 좋아하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작가의 문장에는 아름다우면서 공포스럽고 유머러스한 정서가 깃들어 있다. 상반된 정서의 결합은 영어로 번역하기 더 쉽다. 꿈같은 번역이었다. 죽을 때까지 정 작가님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부커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선 “후보에 오른 번역가들이 번역뿐 아니라 해당 작품을 인정받기 위해 해왔던 노력과 고생을 잘 안다”며 “어느 분이 상을 받아도 제가 받은 것처럼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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