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발달로 우주까지 가는 시대에
바이러스 앞에 맥없이 발묶인 처지 성찰
젊은 작가들 영상·사진·설치 작품 통해
가상세계·무착륙 비행 등 한계·착각 묘사

‘모든 인간은 자국 내에서 이동의 자유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13조 1항이다. 이동의 자유는 당연시됐다. 당연해서 의식되지도 않았다. 팬데믹 이전까지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세계적 감염병 사태의 막바지를 감지하는 지금, 팬데믹이 일으킨 사회의 지각변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미술을 통해 사회가 성찰해야 할 화두를 제시해온 아르코미술관이 이번에 택한 주제는 ‘이동’이다.
인간, 문명, 과학의 힘으로 지상은 물론 이제 우주로까지 나아가는 시대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지면 위의 이동을 넘어, 항공우주산업으로까지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을 쾌속 주행하던 인간과 산업의 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앞에 맥없이 발이 묶인 처지가 됐다. 방역을 위해 철저히 이동이 통제된 시간을 보낸 것. 어디든 갈 능력이 있음에도 어디도 갈 수 없는 이 아이로니컬한 시대, 작가들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8명의 작가들은 비관과 낙관, 착각과 가능성이 교차하는 8인 8색 작품들을 내놨다.
서울 종로구 동숭길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투 유 : 당신의 방향’에서 영상, 사진, 설치 등 작품 20여점이 공개됐다. 김익현, 김재민이, 닷페이스, 송예환, 송주원, 오주영, 유아연, 정유진 작가가 참가했다. 작가 절반가량이 1990년대생이어서 미래세대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더욱 호기심이 생긴다.

미디어아트 작가 오주영의 설치작품 ‘구름의 영역’은 통통 튀는 생각을 거창하지 않게 올망졸망 풀어내는 요즘 세대 작가의 감수성이 풍기는 작품이다. 1990년대 오락실 풍경이 떠오르게 하는 레트로 게임기 3대를 중심으로 한 설치 작품들이 놓여 있고 게임기 안에는 실제 작가가 서사를 구성해 만든 게임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게임의 서사는 가상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변화로 대기가 뜨거워지고 항공모빌리티 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들이 하늘을 빼앗기고 지하 세계에 살게 됐다. 인간 역시 기후난민과 상위계층으로 나뉘었다. 관람객은 이런 세계를 만드는 데 앞장선 연구소장의 입장, 연구소의 양심 세력 연구원의 입장, 날지 못하게 된 새의 입장에서 각각 게임 플레이를 즐기면서 생존 경쟁, 생존 전쟁에 놓인 상황을 체감할 수 있다. 새로운 이동기술이 초래할 윤리적 딜레마를 깊이 있게 고찰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래픽디자이너인 송예환 작가의 설치작품 ‘월드와이드’도 흥미롭다. 오프라인 이동이 제약받은 팬데믹 시대, 온라인과 가상세계, 메타버스 등은 이동의 자유를 만끽할 공간으로 여겨져왔다. 작가는 이런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가상세계에서의 정보공유가 각광을 받지만, 웹 환경이 실제로는 얼마나 제한적 세계를 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십개 화면이 모여 화려한 영상을 표출하는 작품은 웹 세계의 환상적인 전능함을 은유하지만, 구석구석 작은 범위 내에서 정해진 자리만 맴돌고 있는 마우스의 움직임은 웹 세계 전체를 항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모습을 닮았다. 무한히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알고리즘에 갇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제한된 정보만을 접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과, 서로 다른 생각과 절대로 닿지 않는 처지다.
직접 배달노동자로 일하며 작품을 만든 유아연 작가의 ‘벌레스크’도 흥미롭다. 배달노동자로 일하며 자신의 헬멧 위에 카메라를 달고 자신의 경로를 녹화했다. 배달 플랫폼이 보편화된 팬데믹 시대가 노동의 주체는 삭제되고 용이하게 결과만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면, 작가는 삭제된 배달노동을 전면에 살려내며 세계의 주인공으로 가시화했다.

미디어스타트업인 닷스페이스를 미술관에서 만나는 경험도 이색적이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닷스페이스의 ‘우리는 어디서든 길을 열지’ 프로젝트를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동이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이들이 편견 없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발화, 협력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정유진 작가가 팬데믹 시기 항공사 이벤트로 여객기들이 무착륙 비행을 했던 것을 롤러코스터에 빗댄 것도 재미있다. 설치작품 ‘돌고 돌고 돌아’다. 그는 주차비를 절약하고, 면세품 구매를 촉진하기 위해, 소비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는 시스템의 힘으로 인해 ‘이동을 위한 이동’을 하는 비행기들에 주목했다.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고점과 저점을 반복하다 정착 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롤러코스터를 닮았다고 봤다.
전시는 4월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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