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진영 “연방대법관 임기 18년으로 제한해야”
브라이어, ‘대법관 종신제’ 지키려 거취 결단한 듯

올해 83세인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종신 재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조기 은퇴하기로 함에 따라 그간 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 도입을 추진하던 ‘대법관 임기제’는 동력을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보다 젊은 진보 대법관이 필요하다”는 진보 진영의 요구를 받아들여 퇴진하는 모양새를 갖춘 브라이어 대법관의 진짜 의도는 미 헌정사의 오랜 전통인 ‘대법관 종신제’를 지키려는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보수 우위’ 대법원 겨냥한 사법개혁 목소리 거세
29일(현지시간) 미 언론에 따르면 최근 대법관 종신제를 임기제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제안이 담긴 보고서가 조 바이든 대통령한테 제출됐다. 이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사법개혁위원회를 꾸려 대법관 임기 등 사법부 관련 현안들의 검토를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미 대법원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으로 채워지는 등 ‘보수 절대우위’ 구도가 굳어졌고,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후보 시절 “당선되면 대법원을 포함해 사법부 개혁이 나서겠다”고 공약했었다.
미국은 연방법원의 경우 판사가 한 번 임명되면 사망하거나 본인이 스스로 그만둘 때까지 재직할 수 있는 종신제의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는 대법원도 마찬가지여서 40∼5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법관에 오르면 20년은 기본이고 30년도 훌쩍 넘게 재임하곤 한다.

◆진보 진영 “연방대법관 임기 18년으로 제한해야”
문제는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 보수 대 진보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면 모르겠는데, 보수나 진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상태에서 대법관들이 20∼30년씩 재직하면 ‘이념적 편향’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당장 현 대법원은 진보 성향 대법관이 브라이어 등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6명은 보수 색채가 짙다. 이 6명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의 경우 올해 49세로 향후 30년 이상 대법원을 지키며 보수적 목소리를 낼 것으로 관측된다.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이런 현실이 몹시 불만이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대법관 종신제의 폐지, 그리고 임기제 도입이다. 대법관 임기를 18년으로 제한해 취임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러나도록 함으로써 대법원 인사에 숨통을 틔우자는 논리다. 겉은 그렇지만 실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임명된 보수 대법관들을 빨리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진보 대법관을 밀어넣겠다는 속셈이다.
다만 이를 위해선 연방헌법 개정이 필요한데다 대법관 종신제는 미국이 벌써 200년 넘게 지켜온 전통이라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극심한 부담을 느껴 온 게 현실이다. 그는 지난해 “대법관 임기 제한을 지지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저 않고 “아니다(No)”라고 대답한 바 있다.

◆브라이어, ‘대법관 종신제’ 지키려 거취 결단한 듯
브라이어 대법관의 자진 사퇴 의사 표명 후 바이든 대통령은 크게 반기며 후임에 진보 성향의 흑인 여성 후보자를 지명할 뜻을 내비쳤다. 미 사법사상 흑인 대법관과 여성 대법관은 여럿 있었지만 흑인 여성 대법관은 아직 배출된 바 없다. 벌써부터 커탄지 브라운 잭슨(51) 연방항소법원 판사, 레온드라 크루거(45) 캘리포니아 주(州)대법원 대법관 등이 유력 후보로 꼽힌다. 이들은 모두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민주당 등 진보 진영 입장에선 올해 40대 중반 또는 50대 초반인 젊은 진보 법률가가 대법관에 올라 향후 30년가량 재직하며 대법원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다. 대법원이 진보 대법관으로 채워지는 경우 대법관 종신제는 진보 진영에도 분명히 이익이 되는 제도다. 자연히 대법관 임기를 18년으로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추진 동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브라이어 대법관의 조기 사퇴 의사 표명은 진보 진영의 요구에 부응함과 동시에 대법원의 오랜 전통인 대법관 종신제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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