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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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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2-24 21:42:28 수정 : 2021-12-24 2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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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힘들었던 2021년 한해
그리스 곡 들으며 세밑 마무리
신발이 지나온 길이 곧 나의 길
꽃길만 걸을 ‘더 좋은 날’ 기대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이나 헨델의 메시아,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해마다 어김없이 들어야 세밑을 비로소 실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하나였는데, 올해는 특별히 2021년을 마무리하는 곡을 스스로 골라봤다.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이다. 그리스 출신이라는 점에서 마리아 칼라스를 뒤이은 아그네스 발차가 애잔하게 부르는 그리스 민요풍의 곡이다.

더 좋은 날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꽃신을 신는다’가 좋은 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맞기를 바랄 때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말하지 않던가. 누구라도 진흙 범벅이 된 신발로 꽃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그리스신화 속에는 신발에 대한 묘사가 종종 나온다. 이아손이 물에 떠내려간 가죽신 한 짝을 따라가다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이야기도 있고, 페르세우스가 새로운 과업에 착수하기 전에 날개가 달린 가죽샌들을 신에게서 선물받는 장면도 있다. 테세우스는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의 가죽신을 신고 다닌 덕에 훗날 아버지를 찾게 된다. 그리스신화를 풀어쓴 소설가 이윤기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한 짝이 신발주인의 정체를 밝히는 결정적인 증표가 되듯, 신발은 곧 자아를 상징한다고 지적한다. 이력서에서 이(履)는 신발이다. 신발이 지나온 길들이 곧 나의 역사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름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지만, 사실 이름은 나를 대표할 뿐 나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한다. 신발이 나의 구체적인 현실인 데 반해, 이름은 그저 내 영혼이 향하고 있는 이상인지도 모른다. 2018년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최근에 한꺼번에 봤는데, 거기에 마침 신발과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주인공(아이유 분)이 나온다.

그녀는 낮에는 중견기업 사무실에서 잡무를 하고 저녁에는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며 식당 손님들이 남긴 음식으로 대충 허기를 채운다. 생활비를 버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서다. 힘에 겨운 와중에 귀가 들리지 않는 할머니도 돌봐야 하고, 상습적으로 협박하며 괴롭히는 자까지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극중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지안, 편안함에 이른다는 의미다.

카메라는 지안이 낡아빠진 얇은 스니커즈를 신고 서있는 장면을 자주 확대시킨다. 추운 날씨에도 신발 위로 발목이 맨살로 드러난 것은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차가운 세상에 대한 저항처럼 느껴진다. 스니커즈는 ‘살금살금 가다, 몰래 하다’는 뜻의 영어 ‘sneak’에서 나왔고, ‘은밀한 일을 행하는 사람, 비열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엘리자베스 세멀핵이 쓴 ‘신발, 스타일의 문화사’에 스니커즈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다루어져 있는데, 최초의 스니커즈는 캔버스 천으로 만든 신발에 고무밑창을 덧댄 것을 일컬었다. 스니커즈를 신으면 미끄럽지 않고 민첩해졌으며 발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물건을 훔치거나 비밀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선호했다고 한다.

요즘엔 스니커즈를 좀도둑과 연관 짓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경직되지 않은 조직에서 일하거나, 창의적이고 활동적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봐준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의 지안은 정말로 소리 나지 않게 남의 뒷조사를 하고 도청하는 일을 한다. 들키면 언제든 냅다 달아날 준비가 돼 있다. 그녀가 회사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달리기가 특기라고 단 한 줄 쓰여있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라고 지안은 고백한다.

발소리도 없고 발자취도 없이 달아나듯 살았던 지안이 자아를 찾는 걸로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세월이 흐른 뒤 환해진 지안이 화면에 등장하고, 아저씨가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하고 안부를 묻는다. “네”라고 답하고 사라져가는 그녀는 더 이상 스니커즈 차림이 아니다.

올해를 한눈에 보려면 신발장을 열어보면 된다. 빛나는 자리에 근사하게 나를 세워주었던 신발도 있고, 초조했던 날의 신발, 그리고 정신없이 다니다 넘어졌던 신발도 있다. 한 해 동안 내가 어땠는지 내 신발들은 샅샅이 기억하고 있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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