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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선] ‘피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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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0-14 23:34:45 수정 : 2021-10-14 23: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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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OOO.’

 

빈칸에 들어갈 단어로 어떤 게 떠오르시는지? 나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든가, 에너지 전환, 온실가스 감축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환경 기사를 주로 쓰기 때문에 드는 주관적인 느낌일까 싶어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 서비스에서 ‘피할 수 없는’이라는 단어의 연관어를 검색해 봤다. 검색어의 앞뒤 혹은 그 주변에 등장하는 단어에 가중치를 매겨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김부겸’을 검색하면 국무총리와 코로나19가, ‘아프가니스탄에서’라고 하면 탈레반과 현지인 직원, 미군이 상위에 랭크되는 식이다.

윤지로 국제부 차장

‘피할 수 없는’으로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2위가 신재생, 3위는 탄소중립이었다. 메탄가스(6위)와 유럽연합(EU·7위), 탄소국경세(9위)까지 합쳐 상위 10위 가운데 5개가 기후변화 대응에 관한 것이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탄소중립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국제질서”(8월2일 산업부 보도자료)라고 했고, 한 대기업 관계자는 “친환경은 이젠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며 “신재생 에너지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할 것”(9월14일자 언론 인터뷰)이라고 밝혔다. 온실가스 감축을 선언한 지방자치단체장도, 금융회사 애널리스트도 변화는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지구의 날 기후정상회의를 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EU의 탈탄소 패키지 법안을 발표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이런 표현(unavoidable, inevitable, irreversible)을 썼을까 싶어 연설문을 봤지만, 없다. 유독 한국에서 기후 대응을 피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건 실은 너무나 피하고 싶었다는 방증 아닐까. (나부터도 비슷한 상황에서 피할 수 없다는 표현을 쓴다. 가령 ‘칼럼 마감일이 벌써 내일이구나. 진짜 피할 수 없게 돼 버렸어….’)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변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지난 8월 탄소중립 시나리오안이 공개됐을 때 재계는 “기업이 맞닥뜨린 상황을 반영해 달라”고 했고, 최근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제시되자 “목표 달성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EU나 영국, 미국의 연평균 감축률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내는 건 무리라는 것인데, 당연한 얘기다. 10∼20년 전부터 온실가스를 줄여온 나라와 보폭을 맞추려면 과속할 수밖에. 원래 벼락치기는 괴로운 법이다.

 

우리가 그렇게 미루고 미뤄온 사이 세계는 자꾸 ‘게임의 룰’을 추가한다. 탄소에 일종의 관세를 물리는 탄소국경세가 등장하더니 온실가스 중 메탄만 콕 집어 2030년까지 2020년 대비 30% 줄이자는 ‘글로벌 메탄 서약’도 등장했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피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찾아보니 1991년 2월 초대 환경외교 전담 대사로 지명된 권인혁 당시 외무부 본부대사의 이런 인터뷰가 나온다.

 

“온난화가스 배출규제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이므로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피할 수 없다는 말은 그만하고 30년 묵은 숙제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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