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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확인된 월성 인골… 사람 제물로 다져 진 천년 신라의 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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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9-07 09:18:36 수정 : 2021-09-07 09: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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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전경과 인골 발굴 지점(빨간 원). 문화재청 제공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 월성의 한 지점에서는 여러차례 사람뼈가 출토됐다. 1985년, 1990년 조사에서 20구 이상이 나왔고, 2017년에도 50대의 남녀 인골이 한 구씩 출토됐다. 그리고 최근 조사에서 또 한 구가 발굴됐다. 우연히 이 곳에 여러 개의 무덤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발견 지점의 성격을 감안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확인된 건 아니지만 수십 구의 인골이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발견된 이 곳은 월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인주설화’(人柱說話)라는 게 있다. 토목공사를 할 때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나 물속에 넣으면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반영한 이야기다. 희생된 사람의 영혼이 건축물 속에 들어가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었다고 한다. 1343년(충혜왕 4)에 왕이 민가의 어린 아이를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역사서의 기록도 있다. 

 

발굴 결과, 인주설화 등을 고려하면 월성의 인골은 인신공희(人身供犧·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낸 의식)의 흔적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왕성이 튼튼하게 오래가기를 바랐던 당대 지배층은 염원을 이루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최근 경주 월성에서 발굴된 여성 인골.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 조사에서 여성 인골 1구를 추가로 발굴했다고 7일 밝혔다. 출토유물 전수조사와 연대분석을 통해 월성이 문헌에 101년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는 것과 달리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즈음은 신라가 주변국들을 복속시키며 힘을 키워가던 때이다.    

 

월성 서문지에서 이번에 확인된 여성 인골은 이전의 것들과 달리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를 착용한 상태였다. 키는 135㎝ 전후로 왜소하다. 주변에서는 말, 소 등 대형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동물뼈가 나왔다.

1985년 조사에서 확인된 인골. 문화재청 제공
2017년 발굴에서 확인된 남녀 인골. 문화재청 제공

이 곳에서 약 10m 거리에 2017년 50대 남녀 인골 1구씩, 1985년과 1990년 20구 이상이 나왔다. 연구소 박성진 연구관은 “월성 기초부 공사를 끝내고 성벽을 거대하게 쌓아 올리기 전에 묻었다”며 “성벽이 튼튼하게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성벽의 중요한 시설인 대문 근처에서 의식을 치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립대 신희권 교수는 “인골들의 출토양상을 보면 성벽, 특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 집중되어 있다”며 “성벽 밑바닥에서 나오고 있어서 공사를 시작할 무렵 제사를 지내기 좋은 곳에 의도적으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월성의 다른 지점에서 비슷한 인골의 출토될 가능성을 두고는 “있다면 다른 대문이 있던 지점일 텐데 대문이 있는 곳마다 사람을 제물로 바쳤을까 싶기는 하다”며 “서쪽 문이 있던 곳에서 인골이 많이 나온 만큼 신라인에게 서쪽이 가지는 의미나 이 지점과 가까운 외부 지역과의 연관성 등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월성의 축조 시점이 문헌에 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흥미롭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월성이 파사왕 22년인 101년에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소는 출토 유물 전수조사와 이 중 40여 점에 대한 연대분석을 통해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완공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헌 기록과는 250년 정도가 차이가 생긴다.          

 

이 때는 사로국이 주변 지역을 병합하면서 신라로 발전을 이뤄가던 시점이다. 5세기는 신라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조성되던 시점이기도 하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이 출현하고, 국가의 권위를 창출해가던 때인 것이다. 경북대 주보돈 명예교수는 “4세기 중엽은 왕을 마립간으로 부르고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는 등 사로국이 신라로 새로 출범하는 양상을 보였던 때”라며 “월성의 축조도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이번 발굴결과가) 초기 신라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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