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나 보다. 원시림 같은 울창한 나무들이 햇살 한 줌 허락하지 않는 깊고 깊은 골짜기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 듯하다. 한참 동안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자 막힌 귀를 뚫어주듯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는 장쾌한 두 줄기 폭포. 기암괴석은 병풍처럼 폭포를 둘러싸며 그 물들을 모두 가둬 영롱한 에메랄드빛 감도는 거대하고 깊은 소를 만들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태고의 신비 가득한 ‘한국의 블루라군’ 제주 원앙폭포. 자연이 빚은 경이로운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블루라군 주인공처럼 신비한 물속으로 ‘풍덩’
‘책받침 세대’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를. 1980년대 우리나라 남학생들의 책받침을 점령했던 ‘3대 여신’이다.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를 놓고 친구들과 티격태격 다투기 일쑤였을 정도니 그들이 당시 청소년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특히 1980년 공개된 영화 ‘블루라군’은 브룩 쉴즈를 ‘이브’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사촌지간인 크리스토퍼 앳킨스(리처드 역)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타고 가던 쉴즈(에믈린 역)는 배가 화재로 난파돼 표류 끝에 아무도 살지 않는 푸른 산호섬에 도착한다. 원시적인 대자연 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아담과 이브처럼 둘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 영화 속 배경인 푸른 산호섬은 풋풋한 그들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면서 날것 그대로인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블루라군(blue lagoon)은 ‘푸른 산호초’라는 뜻. 산호초는 아니지만 영화 블루라군 속 풍경처럼 원시적인 신비 가득한 곳이 1994년에 접근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돈내코로 원앙폭포다. 제주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최근 제주여행이 급격하게 늘면서 소셜네트워크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장대비로 바뀌더니 급기야 폭우처럼 퍼붓는다. 오늘 하루는 호텔을 벗어날 수 없겠다. 스마트폰만 이리저리 뒤적이다 비온 뒤 꼭 가야 하는 제주 명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엉또폭포와 원앙폭포. 다행히 다음날 아침 비 그치고 햇볕이 쨍쨍하니 이름도 독특한 서귀포시 강정동 엉또폭포로 달려간다.


엉또는 제주어로 ‘작은 굴(엉)로 들어가는 입구(또)’란 뜻. 한라산 남쪽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악근천 중상류에서 만나는 기암절벽이 엉또 폭포다. 평소에는 물기 하나 없는 폭포로 보일 듯 말 듯 울창한 천연 난대림 속에 숨어 지내다 한바탕 비가 쏟아져야 위용을 드러낸다. 산책로입구 안내판에 ‘1박2일 엉또폭포’라 적혀 있다.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되면서 비만 오면 여행자로 붐비는 곳이 됐다. 10여분을 걸어 아찔한 50m 수직절벽이 깊은 소를 둘러싼 엉또폭포 전망대에 섰다. 아뿔싸. 절벽은 젖은 흔적만 있을 뿐 폭포가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가. 폭포 인근 카페 주인장은 “어제 폭우가 쏟아질 때 잠깐 흘렀다”며 이미 늦었단다. 카페에서는 폭포수가 장쾌하게 쏟아지는 엉또폭포 영상을 계속 틀어 주는데 한라산 산간 지역에 70㎜ 넘는 비가 와야지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단다. 몰랐다. 엉또폭포는 무조건 비오는 날에 가야 하는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쏟아질 때. 역시 엉또폭포는 소문대로 아무 때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원앙폭포로 발길을 돌린다.


원앙폭포도 한라산에서 시작된 차고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경치가 빼어난 돈내코 계곡 깊숙한 곳이 숨어있다. 주차장에서 원앙폭포까지 계곡을 따라 데크길이 700m가량 이어진다. 20분 정도 걸리는데 오솔길로 들어서자 울창한 숲에서 쏟아지는 피톤치드가 기분을 상쾌하게 끌어올린다. 데크길 끝에서 매우 가파른 계단을 5분가량 내려가니 청아하면서도 장쾌한 폭포수의 연주가 들려온다. 이곳에서도 폭포를 보지 못할 것 같던 불안감을 순식간에 잠재우는 반가운 소리다. “와!” 보는 순간 그만 입이 쩍 벌어진다. 이곳이 과연 인간계가 맞는 것일까. 5m 높이 절벽에서 거대하고 깊은 소로 원앙처럼 다정하게 떨어지는 거대한 두 개의 물줄기는 여기가 무릉도원이라 외치는 듯하다. 어디선가 10대의 쉴즈가 수줍은 미소로 걸어 나올 것 같다.


여행자들이 폭포수를 온몸으로 맞거나 바닥이 투명하게 보이는 에메랄드색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은 에덴의 동산에 온 듯, 비현실적이다. 이끼로 덮인 바위와 병풍처럼 두른 기암괴석까지 어우러져 평생 잊지 못할 비경을 선사한다. 그냥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폭포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힐링이다. 하지만 푸른 물로 풍덩 뛰어들고픈 유혹을 참기 힘드니 수영복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깊은 소 아래쪽은 물이 얕아 발만 담그고 신선놀음을 할 수 있다.


#한반도 담으러 남원 큰엉 갑니다
화산폭발로 생겨난 제주는 원앙폭포처럼 자연이 조각한 신비로운 작품이 곳곳에 널려있다. 올레길 5코스 구간에서 마주하는 서귀포시 남원리 큰엉해안경승지도 요즘 제주의 핫플레이스. 산책로 중간쯤에 있는 한반도 지도 모양의 숲터널 때문이다. 평일인데도 많은 여행자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나무로 둘러싸인 산책로 터널이 묘하게도 한반도 모양을 닮았는데 사진을 찍으면 푸른 바다의 수평선도 함께 담겨 근사한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팔로 하트를 그리며 뒷모습을 담는 연인들, 벤치에 앉아 사색하는 포즈를 잡은 여행자, 어깨를 감싼 단란한 가족들까지. 모두 저마다 잊지 못할 추억을 담느라 분주하다.


남원 큰엉의 진가는 한반도 모양 터널보다 기암절벽에서 드러난다. 쪽빛 바다 위로 높이 30m, 길이 200m의 절벽이 펼쳐지는 풍경이 압권이다. 남원 큰엉은 이름처럼 큰 바위가 바다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언덕. 억겁의 세월 동안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가 절벽을 깎아 2개의 커다란 동굴과 기암괴석을 조각해 놓았다. 바다로 돌출된 인디언 추장얼굴 바위는 산책로에서 보면 영락없는 추장 얼굴이다. 동쪽의 구렁비부터 서쪽 황토개까지 약 2.2㎞에 걸쳐 해안 산책길이 이어지며 곳곳에서 절경을 쏟아내기에 지루할 틈이 없다.



#신이 빚은 듯 장엄한 대포주상절리대 육각 돌기둥
서귀포시 이어도로 올레길 8코스에 속한 중문 대포주상절리대는 자연이 빚은 걸작을 따라가는 제주 여행에 정점을 찍는다. 산책로를 따라 절벽 가까이 가자 연필을 한데 묶어 세운 듯, 정교하게 겹겹이 쌓은 검붉은 육각형 돌기둥이 수직절벽을 따라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다. 거북의 등껍질과도 흡사하다. 수직절벽 단면 역시 돌기둥을 하나하나 가지런하게 세운 듯 보면 볼수록 신비롭다. 주상절리를 제대로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바다색 감상. 파도가 주상절리를 때리며 거대한 포말을 만들 때면 푸른 잉크를 풀어 놓은 듯한 쪽빛 바다의 오묘한 색감이 제대로 전달된다. 주상절리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며 높이 30~40m의 주상절벽이 중문동에서 대포동 해안을 따라 무려 약 2㎞나 펼쳐진다니 신이 빚은 걸작이 틀림없다.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가 전망대에 섰다. 자연의 위대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절경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린다. 화산폭발 때 약 섭씨 1100도로 뜨겁게 팽창됐던 용암은 분출된 뒤 천천히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든다. 이런 수축작용이 반복되면서 수직으로 쪼개져 4∼6각 모양의 독특한 주상절리 돌기둥이 만들어졌다. 그냥 절벽 덩어리이면 심심했을 텐데 오랜 시간 파도와 바람이 공들여 깎고 깎아서 높낮이가 제각각인 걸작이 완성됐다. 야자수로 꾸민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주상절리가 좀더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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