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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악마의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박윤정의 원더풀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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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8-21 09:00:00 수정 : 2021-08-18 20:14:06
박윤정 여행가 민트투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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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필라투스

예수 처형한 ‘필라투스’ 망령이 있다는 곳
톱니바퀴 열차 타고 가파른 경사 올라가
2000m 산 정상엔 걸음걸음마다 구름 가득
케이블카 타고 내려오는 길 초원·호수 절경
루체른 호수. 이른 새벽 인적 드문 루체른 호수 주변을 산책한다.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이고 바로 앞엔 안개 낀 호수 위에 잠자는 백조까지 동화 속 세상이 따로 없다.

스위스 그랜드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은 설렘과 고민의 순간이 매시간 함께했다. 도시를 선택하더라도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지 못하고 항상 또 다른 선택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순서로 관광지를 방문할까?’가 아니라 ‘어느 봉우리를 오를까?’라는 고민으로 선택의 연속이다. 게다가 날씨 상황이 방문을 허락해야 하니 나의 선택과 함께 자연의 허락도 함께 기다려야 한다. 알프스산맥이 국경 넘어 이어져 있는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도 같은 망설임을 경험할 수 있지만 스위스에서는 조금 다르다. 주변국들보다 더 많은 영토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매번 산들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자연에서 주는 힐링만큼 행복한 고민과 함께 선택의 스트레스를 지불해야 한다.

첫 도착지인 루체른에서도 창밖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며 손짓한다. 호수를 에워싸는 봉우리의 끝자락에 시선을 마주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시작된다. 지난밤 여러 차례 하늘을 가르던 번개는 무슨 일을 한 건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대지는 젖지 않은 채 새벽을 맞이한다. 시차 덕분에 자연스레 눈을 뜬다. 낯선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하여 가볍게 옷을 챙겨입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객실 방문을 연다. 살포시 피부에 내려앉는 서늘함에 등을 돌려 카디건을 챙겨든다. 인적 드문 호수는 아직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전이다. 이슬 머금은 풀들은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고 있지만, 호수 위에는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백조들이 고요히 떠 있다. 눈 덮인 산으로 둘러싸인 안개 낀 호수 위, 백조를 보니 어릴 적 읽던 동화 속 삽화가 떠 오른다. 왕자를 기다리는지 고개도 들지 않는 백조들을 뒤로하고 어슴푸레한 안개를 걷으면 호텔로 향한다.

이제서야 만나는 루체른의 사람들. 반려견들과 산책을 시작하고 아침 운동을 하며 호수를 깨운다. 이른 새벽 산책에서 돌아와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낯설지만 코끝에 전해지는 커피 향은 익숙하다. 루체른 시내를 둘러보기 전에 이른 아침부터 손짓하던 창밖 봉우리들을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동안에도 선택의 고민이 끝나지 않아 다시 한 잔을 청한다. 지도를 펴고 고민하는 관광객들을 여러 차례 경험한 듯, 호텔 여직원은 도움을 요청하라는 눈짓을 하며 턱끝을 실룩인다. 어느 선택을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아 힘겹게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의견을 구하기로 한다.

필라투스.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악마의 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필라투스.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2132m의 톰리스호른이다. 트레킹 코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용이 살았다는 용의 동굴을 만날 수 있다.

루체른 호수 동쪽에는 산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리기’, 서쪽에는 톱니바퀴 열차로 유명한 ‘필라투스’, 남쪽에는 지붕 없는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는 ‘슈탄저호른’, 그리고 더 남쪽으로 360도 회전식 곤돌라로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는 ‘티틀리스’가 있다. 고민 없이 네 곳 모두 다녀오고 싶지만, 갈 길이 먼지라 한 곳으로 결정한다. 선택은 호텔 여직원의 안내대로 악마의 산이라 불리는 ‘필라투스’이다. 필라투스라는 유래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예수를 처형한 ‘폰타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의 영혼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전설 때문이란다. 그전에도 그 후로도 이곳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이 계속 더해져 악마의 산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보트 이동. 필라투스를 가기 위해 호수와 구름 같은 안개를 만들어낸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루체른 선착장에서부터 알프나흐슈타트까지 약 50분 정도 배로 이동하다.
보트로 이동하는 동안 펼쳐지는 동화같은 마을 풍경.

필라투스를 다녀오기 위해서 하루면 되지만 그곳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산 넘고 물 건너야 하니 걷고 배 타고 열차 타고 그렇게 여정을 시작하겠지. 선착장에는 톱니바퀴 열차가 출발하는 알프나흐슈타트까지 가기 위한 배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줄 서 있다. 모두들 트레킹 복장으로 간단한 배낭을 둘러매고 설렘 가득한 표정이다. 50여분 이동하는 배에서 지루할 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호수에서 바라보는 산세를 감상하며 기관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방문하지 않는 봉우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하선하는 관광객들을 따라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곳을 다닌다는 톱니바퀴 열차로 향한다. 가장 가파른 경사가 48도라는데 엘리베이터 타고 오르는 기분이다. 속도가 빠르지 않더라도 천천히 호수와 절벽을 감상하기에는 왠지 모를 짜릿함에 스며든다.

톱니바퀴 열차. 필라투스 정상을 오르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곳을 다니는 톱니바퀴 열차를 타는 것이다.

40여분을 오르니 어느새 2000m 넘는 산 정상부이다. 가파른 바위에 서 있는 산양들이 반긴다. 정상 주변 절벽을 타고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호텔과 식당도 보인다. 오를 때 보이던 산세는 덩그러니 봉우리만 남긴 채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올려다본 아름다운 선들은 정상에 오르니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악마의 산이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일단, 붉은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따라 용의 동굴에 들르기로 했다. 산봉우리를 감싸 안은 듯 길게 뚫려있는 동굴 속은 걸음마다 구름이 다리를 휘감는다. 구름을 걷다니! 이런 신기한 경험을 만끽하며 정상에서 시간을 즐긴다. 눈밭을 뒹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수프를 주문한다. 우선 몸을 녹이고 따뜻한 햇살과 함께하고 싶어 화이트 와인 한잔을 더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며 와인 잔에 비추어진 산세를 한참 멍하니 바라본다.

케이블카. 필라투스를 올라올 때와 달리 내려갈 때는 반대편에 설치된 최신식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었지만 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절경을 놓치고 내려가기로 한다. 오를 때와 달리 반대편으로 하산한다. 100년도 넘은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올라 2015년 새로 설치된 최신식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간다. 산으로 오르는 기술은 변하더라도 이곳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일 듯싶다. 최신식 케이블카는 드래곤 라이드라 불린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올라올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필라투스를 만난다. 드래곤 라이드는 산중턱, 프레크뮌테그에 멈춘다. 이곳은 수많은 하이킹 코스가 이어지고 다양한 엑티비티를 즐길 수 있어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위로는 산허리가 보이지 않는 구름이 아직 자리하고 있지만 아래로는 넓게 펼쳐진 초원과 호수, 루체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서야 머릿속에 자리한 초록의 알프스를 만난다. 정상에서 전해진 추위가 초록의 따스함으로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한 잔의 따뜻한 차를 마시며 햇살을 만끽하고 다시 작은 곤돌라에 오른다. 저 멀리 하늘을 오르는 패러글라이딩 배웅을 받으며 크리엔스라는 마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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