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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또 다른 ‘이 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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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11 22:51:37 수정 : 2021-06-11 2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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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지난 6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모 중사의 추모소에는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 ‘졸업’이 흘러나왔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다는 이 노래는 한편으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 중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로 들렸다. 한 명의 가해자만이 아니라 이에 침묵하고 동조했던 ‘미친 세상’이 이 중사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종민 사회부 기자

이 중사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본 직후부터 수차례에 걸쳐 신고했지만, 누구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사건 관계자들과 군 당국은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회유하기에 급급했다. 사건 직전에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방역 수칙을 위반한 것과 관련해 상사들은 “코로나 시국이므로 없던 일로 하자”고 하거나 “여러 사람 다친다”, “가해자의 인생을 생각해서 한번 봐달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이 중사를 보호해야 할 공군의 성추행 대응 매뉴얼도 무용지물이었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비밀 유지 의무 △가해자·피해자 우선 분리 △피해자의 신고 등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행위 금지 등의 부대 관리 훈령은 거꾸로 작동했다. 공군은 피해 사실을 접수하고 이틀 후에 피해자 조사를 했고, 가해자 조사는 사건 발생 15일 뒤에나 이뤄졌다.

그러는 사이 이 중사는 홀로 공군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야 했다. 성추행 정황이 담긴 블랙박스 파일을 직접 제출하기도 했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성 고충 상담관과 22회의 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이 중사는 지난달 22일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공군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중사의 신상정보뿐 아니라 사망 전 그간의 피해 사실을 남긴 동영상의 내용이 내부에 퍼졌다. 공군의 부실한 수사에 문제를 제기한 유족에게는 ‘악성 민원인’이라거나 ‘시체 팔이 한다’고 비난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 중사가 겪은 ‘미친 세상’은 절망적이게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중사의 죽음이 알려지고 난 뒤 또 다른 ‘이 중사’들이 수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범행을 저지른 정황이 확인됐고, 육군 특수전사령부에도 성추행 피해자에게 회유·압박이 가해진 경우가 있었단 게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9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에는 이런 실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부대 내 성희롱·성폭력 관련 고충이 제기됐을 때 공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답한 여군 비율은 48.9%를 기록했는데 2012년 실태조사(75.8%)보다 크게 감소한 수치였다.

문제는 이런 병폐가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를 가진 군대에 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2차 가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꾸준히 나오는 가운데 지금도 한 유명 포털 사이트에는 ‘공군 성추행 피해자’의 ‘신상’이나 ‘얼굴’을 찾는 연관 검색어들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 이 중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미친 세상’을 바로잡아야만 한다.

 

이종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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