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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맛깊은인생]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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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08 23:09:41 수정 : 2021-06-08 23: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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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식당을 흔히 노포라고 부른다.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50~100년 이상된 집을 말한다. 3대, 4대를 이어져 오는 집들이다. 서울에는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 많다. 물론 지방에도 많다. 요즘에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노포를 찾아다니는 것이 유행이다. 요리사 박찬일이 쓴 책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은 전국의 노포를 찾아다니며 그 집의 솜씨와 장사철학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박찬일은 노포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을 몇 가지로 간추린다. 우선 기본에 충실하다. 재료는 늘 제일 좋은 것을 사용하고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종로의 해장국집 청진옥은 1937년 창업해 3대째 이어오고 있다. “불을 끄지 말고 영업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상을 지내면서도 솥에 끓였다. 대구의 추어탕집인 상주식당은 1957년 창업했다. 이 집은 한겨울에는 문을 닫는다. 추어탕의 주재료인 미꾸라지와 고랭지 배추를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부터 이렇게 해왔다. 완벽하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집 주인의 고집스러운 철학이다. 서울의 냉면집 우레옥은 직원들이 정년이 없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근무할 수 있을 때까지 근무한다. 지난해 퇴임한 김지억 전무는 58년간 근속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노포를 다닐 때가 많다. 출장을 가기 전 인터넷에 출장지 이름과 함께 노포를 넣어 검색해보고 출장지 가까운 곳에라도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간다. 냉면이든, 짜장면이든, 국밥이든, 돼지갈비든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서 먹다 보면 취재를 하지 않더라도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음식 맛뿐 아니라, 손님을 대하는 직원들의 접객태도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직원들의 재빠른 움직임, 잘 닦아진 테이블, 언뜻 보아도 청결한 주방 등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기본, 원칙, 고집, 애정…. 우리가 비효율적이라며 쉽게 무시하고 넘겨버리는 이런 덕목들이 노포들에는 오히려 브랜드인 것이다.

단골 함흥냉면집이 있다. 노포라고 할 만한, 아주 오래된 집이다. 점심을 먹으러 이 집에 갈 때마다 주인 할머니가 꼭 같은 자리에 앉아 함흥냉면을 먹고 있는 것을 본다. 아마도 몇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있을 것이다. 양념이 어떤지, 면발은 너무 질기지 않은지, 육수는 너무 짜지 않은지 굳이 맛보지 않아도, 냄새만 맡아도 아니 냉면이 담긴 모양만 보아도 오늘의 냉면 상태에 대해 알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들이 보이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고통과 유혹과 지루함을 이겨내고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 시간을 견뎌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필사적인지.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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