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줄타기 외교’서 美로 무게축 이동
44조원 對美투자·모더나 백신 위탁생산
美, 화웨이 배제 위한 통신협력도 예고
“韓기업, 미래기술선 美와 함께한단 뜻”
국제사회 입지 좁아진 中… 반발 자제
코로나 계기 ‘세계의 공장’ 中에 회의론
韓, 中 대신할 국제분업 책임자로 부상
“정부, 美와 中보복 대응전략 준비해야”

“한국은 안보 의제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서려고 한다는 관찰이 있지만 적어도 한국 기업들은 최첨단 미래기술 분야에서는 미국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미국 애틀랜틱카운슬과 한국 동아시아재단이 ‘한미 정상회담과 경제협력의 미래’를 주제로 한 화상대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이 그동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벌여왔지만 이제는 그 방향타를 미국으로 확실히 선회했다는 의미다. 파장을 고려해서인지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인 김 전 본부장은 이 발언에 대해 기업의 임원이 아닌 전직 관료의 입장에서 말했다고 부연했다.
◆외줄타기 외교 종지부, 미국 편에 선 한국
7일 재계 안팎에서는 김 전 본부장의 발언이 한·미 정상회담의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분석했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한국은 군사적 동맹에 기반을 둬 미국과 손을 잡아 왔다. 반면 경제 분야에서는 최대 교역국이자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온 중국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을 계기로 사실상 경제 분야에서 중국 대신 미국의 손을 잡고 경제동맹을 체결한 셈이다.
이번에 삼성, 현대차, LG, SK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 총출동해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등 미래 사업분야에서 총 44조원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업 대표들을 직접 거명하며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그동안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해 왔는데 이번에 미국의 편으로 무게 중심이 많이 옮겨갔다”며 “한국이 중국과 경합하는 기술 분야가 많았는데 이런 대목에서 상당한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사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전환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한·미 정상회담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미 양국의 관계가 각자의 강점을 활용해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대등하고 호혜적인 ‘핵심 경제협력 파트너’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분야 협력 외에도 미래 기술인 6G, 인공지능, 양자기술, 청정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약속했다. 특히 관심이 집중된 것은 첨단 정보통신 기술협력이다. 그동안 중국 화웨이가 시장을 점유해온 것에 대해 미국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며 압박해왔고 앞으로 한국과 기술 협력을 통해 이 시장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해 나갈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전 슈와브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이번 회담을 평가하면서 전통적인 안보 대신 경제 문제가 부각된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슈와브 전 대표는 “중국은 한·미 양국에 주요 시장이지만, 경쟁 및 안보 관점에서는 주요 위협”이라며 “앞으로 한·미는 중국에 대한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기술 이전을 주요 현안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최근 바이오 안보의 핵심으로 떠오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해 양국은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 모더나의 백신을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위탁 생산하기로 했고 SK바이오사이언스는 미국 노바백스 백신을 국내에서 만들기로 했다. 이는 미국의 기술로 개발한 백신을 한국에서 단순히 생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공급 거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지 좁아진 중국, 보복 시 대응 전략 세워야
한국이 미국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중국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만과 남중국해가 언급되자 중국은 반발했다. 다만 앞서 이뤄진 미·일 정상회담 이후 보였던 반발 수위에 비해 강도가 낮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코로나19의 발원지로 지목되면서 입지가 좁아진 것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또 미국 행정부가 중국 기업을 배제하는 가운데 조만간 반도체·배터리·희토류·바이오의약품 4개 핵심 부품 공급망 문제에 대한 검토 결과 발표를 앞둔 상황도 감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 지역 거점으로 한국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경우 중국은 과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때처럼 한국에 무역보복 등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미국을 통해 적극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재편된 국제분업구조, 한국 영역 넓혀야
최근 한·미 경제협력 강화의 배경에는 깨어진 국제 분업구조가 자리한다. 그동안 중국은 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첨단 기기부터 단순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세계로 공급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전 세계 공장이 각자 멈춰 섰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국제 분업 구조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국경이 폐쇄되고, 물류가 멈추자 일부 국가는 마스크조차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미국도 그동안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졌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분업구조를 짜기 시작했다는 것이 재계의 분석이다.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이 앞으로 반도체·바이오·배터리 분야의 국제적 분업 책임을 맡았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경제협력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향후 다른 국가들도 한국에 새로운 분업 제안을 해 올 것으로 보인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는 이를 위해 재계와 함께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 분업 구조가 한국에 유리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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