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단독] ‘개인의 문제’ ‘여성이 예민해서’…공군 중사 비극 배경엔 후진적 병영문화

입력 : 2021-06-07 17:00:00 수정 : 2021-06-07 17:30:2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공군 성추행 피해 부사관 이모 중사의 분향소. 뉴스1

군인들 절반은 성폭력 사건이 ‘개인이 알아서 조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10명 중 3명 정도는 성희롱·성추행 피해자가 주로 여성인 이유로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명백히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군대 내 성폭력을 조직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이나 잘못으로 인식하는 병영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국방부는 조사결과를 토대로 조직문화 쇄신이나 피해자 지원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고, 결국 지난달 말 공군 부사관 성추행 피해자의 비극도 막지 못했다.

 

7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방부가 지난해 10~11월 정보사 등 7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희롱 성폭력 실태 현황’ 설문조사는 공군 부사관이 극단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짐작케 한다. 이 설문조사는 국방부가 정보사, 안보지원사, 777사령부, 간사교, 군수사, 해병1사단 소속 군인 1492명(남성 1023명, 여성 469명)을 대상으로 양성평등정책 인식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실시됐다.

 

◆‘개인이 알아서 조심해야’ ‘가해자 개인의 문제’

 

국방부에 따르면 ‘군대 내 성폭력 피해를 막기 위해 개인이 알아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질문에 평균 51%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부대별로는 777사령부가 62%로 가장 높았고, 정보사(58%), 해병1사단(49%)이 뒤를 이었다.

 

아울러 ‘군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 개인의 문제다’에 평균 41%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 질문 항목에서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은 해병1사단이 52%, 정보사가 47%, 군수사가 46%, 777사령부가 45%로 조사됐다.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대부분 수직적·우월적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군대에선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높았다.

고인 영정 바라보는 文 문재인 대통령이 6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공군 성추행 피해자 이 모 부사관의 추모소를 찾아 추모한 뒤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청와대 제공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현실과 동 떨어져 있다. 실제 이번 사건의 피해자 이모 중사는 “야간 근무를 바꿔서라도 (회식에) 참석하라”는 맞선임 장모 중사의 강압적 지시에 따라 지난 3월2일 회식에 참석했다. 당시 회식은 업무와 상관없는 선임 지인의 개업 축하자리였다. 이후 회식이 끝나고 후배 부사관이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에서 이 중사는 장 중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근무평정 등으로 인해 상급자의 눈치를 보고, 지시를 거부하기 힘든 위치에 있는 후임 이 중사가 ‘스스로 조심해서’ 추행을 피할 수 없었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음에도 소용없었다. 군대 성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여성이 지나치게 예민해서’, ‘성희롱 문제 조직문화 경직되게 만들어’

 

성범죄 피해자를 문제 삼는 인식도 여전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여성에게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성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명백히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질문에 평균 26%(정보사·777사령부 33%, 군수사 34%, 해병1사단 32%)의 군인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아울러 ‘사소한 것까지 성희롱 문제로 여기는 것이 조직문화를 경직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는 질문에도 평균 13.8%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런 인식은 이 중사가 사건을 즉각 신고한 뒤에도 보호는커녕 ‘2차 가해’를 지속적으로 당하는 배경이 됐다. 이 중사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노모 상사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가해자 장 중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중사를 쫓아가 ‘신고할 테면 신고해 보라’며 협박했다. 다음 날 이 중사가 또 다른 상관 노모 준위에게 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노 준위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대신 이 중사를 불러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 중사는 ‘살면서 한 번 겪을 수 있는 일’,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 국방헬프콜 광고가 걸려있다. 뉴스1

정식 신고가 접수된 이후에도 이 중사를 향한 2차 가해는 끊이지 않았고, 군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가해자 장 중사는 ‘죽어버리겠다’며 협박을 이어갔고, 장 중사 가족도 이 중사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 아들(장 중사)이 명예로운 전역을 하게 해달라고 압박했다. 아울러 같은 부대 약혼자를 상대로도 이 중사의 선임은 ‘젊은 나이에 가해자가 전과자가 되면 힘들지 않겠냐’며 합의를 종용했다.

 

◆'피해자 보호 의심' 27%

 

군이 성폭력 피해자를 지켜줄 것에 대해 불신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군에서 성희롱, 성폭력 상황이 발생하면 상담 및 피해자 지원(보호)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는 문항에 27%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신고했던 이 중사 사건에서도 피해자 지원은 사실상 전무했고, 가해자에 대한 신속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건 발생 사흘 뒤 3월5일 군경찰은 이 중사에 대한 피해자 조사를 마쳤지만 2주 뒤인 3월17일에야 가해자 장 중사를 조사했다. 이후 시간을 끌다가 4월7일 제20비행단 군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다. 이 과정에서 군사경찰은 피해 상황이 담긴 블랙박스를 확보하지 않아 이 중사 측이 직접 제출하기도 했다.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사건 가해자인 공군 장모 중사가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군 검찰도 늑장 수사를 하긴 마찬가지였다. 군 검찰은 당초 장 중사를 6월4일 조사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중사가 극단적 선택(5월22일)을 하자 황급히 조사 시기를 앞당겨 지난달 31일에야 처음으로 피의자 조사를 진행했다.

 

아울러 이 중사가 성고충상담관을 통해 정신적 피해를 호소해 전출을 요청했지만 소속부대(제20전비)는 정기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사가 자살을 암시하는 이메일을 보낸 뒤에야 부대는 전출을 허용했다. 또 법적 조력을 위해 군인 국선변호사(공군 중위)가 선임됐지만 이 중사와 면담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국방부 등에 따르면 지난 3월9일 선임된 국선변호사는 해외 신혼여행과 자가격리를 이유로 이 중사와 면담하지 않았다. 또 5월14일 교체된 국선변호사 역시 이 중사와 2차례만 연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설문조사를 토대로 국방부는 성폭력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게 될 우려가 있다고 진단하며 시스템 보완, 부대원 대상으로 한 성희로 예방 교육,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개선 요소’로 꼽았다. 하지만 4개월 뒤 이 중사 사건에서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어떤 조치도 적용되지 못했고, 끝내 비극을 막지 못했다. 국방부는 특히 지난 2월23일부터 3월31일까지 양성평등정책 관련 현장 소통을 강화하겠다며 육해군 지역 야전 부대를 방문했지만, 정작 이 기간 발생한 이 중사 사건에서 ‘군’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 이 중사 유촉 측 김정환 변호사는 “이번 사건 회유에 가담한 인원들부터 시작해서 한 1년여에 걸쳐서 여러 번 강제추행이 있었고, 피해자가 그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걸 보고 그걸 답습해서 추행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생각된다”면서 국방부 검찰단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