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은 증기기관을 만들어 400년간 세계를 제패했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반도체에 투자한 것이니 앞으로 자네들이 열심히 잘 해내라.”(삼성그룹 창업주 故 이병철 회장 유훈)
삼성전자 사장과 노무현 정부 시절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사진)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30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세미나 기조발표자로 나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유훈을 소개하며 잠시 울먹였다. 진 대표는 삼성전자에서 세계 최초 16메가 D램 개발을 이끈 반도체 신화의 주역으로 불린다.
당시 이 회장은 ‘한국 반도체는 일본 반도체의 모방품’이라는 내용의 한 일간지 기사를 보고 화가 매우 많이 난 상태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이같이 말하고 이틀 후 응급실에 실려가 2달 후 작고했다.
진 대표는 삼성전자가 1993년 메모리반도체 부문 세계 1위로 올라서기까지 이 회장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고 했다.
진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이 흔들린다 : 반도체 산업 패러다임과 미래’ 세미나에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다툼이 격화됨에 따라 한국 역시 국가 차원의 대비책 마련에 나서야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반도체를 판매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진 대표는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반도체 패권 장악도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반도체 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들의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정책환경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진 대표는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격화하는 가운데, “특정 기업의 과점 생태인 현 구조에선 단기간 내에 극복하기에는 쉽지 않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현재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4차산업혁명 등으로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데, 단기간 내 반도체 공급 증가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5~7나노미터(nm, 1nm는 10억분의 1m)급 첨단 팹(Fab‧제조공장) 투자에는 10조원 이상이 소요돼 투자를 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다”고 꼬집었다.
또 그는 “기존에는 4년마다 공장을 증설해 반도체 사이클이 존재했으나 지난 20년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며 “이는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첨단장비 시장 모두 시장이 과점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진 대표는 “차량용 반도체 수요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력소자와 아날로그 자동차용 반도체 주력생산인 8인치 팹의 생산능력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자동차용 반도체 수급 안정에는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진 대표는 “중국이 2015년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수백조원을 투자해 한국 반도체를 추격하고 있으나 미국의 강력한 제재와 낮은 기술 자급률의 한계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세미나에선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 속 미국, 중국, 유럽(EU) 등 주요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역시 민·관이 함께 반도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한국의 강점인 메모리반도체 기술은 살리면서 시스템반도체를 육성하고 파운드리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공통된 견해였다.
이번 세미나는 자동차 업계를 중심으로 반도체 수급 상황이 악화하고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재진출을 선언하는 등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대응 전략을 점검하기 위해 긴급 개최됐다고 전경련 측은 밝혔다.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은 우리나라 국가예산 558조원에 버금가는 약 530조원 규모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 기업들에게 분명 기회가 될 것”고 말했다.
이어 “미국과 중국 등 글로벌 강국들의 반도체 산업 육성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과거의 성공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라면서 “반도체 산업은 대규모 투자, 타이밍, 인재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전경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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