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기업으로 변신하기까지
선대 최종현 회장, 종합에너지회사 꿈꿔
에너지 축적 배터리 시스템 제시가 단초
1985년 울산에 기술지원硏 세우며 ‘탄력’
연구 개발이 기술 발전으로
1991년 전기차용 배터리 개발에 첫 착수
축적된 제조기술 기반 리튬 배터리 성공
양극재 배터리 개발 등 세계 최초의 연속
글로벌 전기차 파트너로 도약
2009년 세계 시장 첫발… 공급 계약 잇따라
美·中·유럽에 공장… 해외 생산체계 갖춰
최태원 회장 “배터리 사업 끝까지 달린다”

“세계 각국은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상황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종합에너지회사로 그 방향을 바꿔야 한다. 종합에너지는 정유뿐 아니라 석탄, 가스, 전기, 태양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축적 배터리 시스템 등도 포함된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모든 사업을 해야 한다.”
최근 한 에너지 기업 대표의 발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이 담화는 39년 전인 1982년 12월9일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당시 유공 사장으로 재직하며 부·과장들과의 간담회에서 나눈 이야기다. 유공은 1962년 설립된 대한석유공사의 전신으로 이후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에 인수됐다.
◆배터리 고대사… 유공에서 SK가 되기까지
전기차 배터리(2차 전지)로 글로벌 기업이 된 SK이노베이션의 성장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8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 기업들이 에너지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개념도 생소했던 ‘에너지 축적 배터리 시스템’은 결국 글로벌 배터리 기업을 만들어내는 뿌리가 됐다.

16일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유공은 1985년 울산에 정유업계 최초로 100억원을 들여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를 기반으로 1991년 전기차용 배터리를 개발했다. 그해 12월에는 태양전지를 이용한 3륜 전기차 제작에 성공했다. 당시 이 차량의 성능은 최고 시속 20㎞, 1회 충전 주행거리 40㎞로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이후 개발의 속도를 높여 2년 만인 1993년 1회 충전으로 약 120㎞를 갈 수 있는 전기차와 배터리를 개발하는 데 이르렀다.
정부의 기술과제 선정도 기술 발전에 전환점이 됐다. 1992년 한국 정부는 G7 과학기술과제라는 주제로 초고집적 반도체,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ISDN), 고선명TV, 전기차, 인공지능컴퓨터, 신의약 첨단생산시스템을 선정했다. 유공 울산연구소는 이 가운데 전기차용 첨단 축전기 개발 주관기관으로 선정됐다. 이 사업으로 전기차용 첨단 축전지인 나트륨-유황 전지를 개발했다.

◆연구개발 바탕으로 꾸준한 기술발전
신선한 광고로도 유명한 SK이노베이션은 회사의 슬로건에서도 기술 진화를 엿볼 수 있다. 1968년 ‘한국 석유산업의 리더’에서 1985년 ‘에너지 걱정이 없는 중요한 미래의 창조’로 에너지 기업으로 17년 만에 진화했다. 2004년에는 ‘대한민국 에너지를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에너지기업으로의 정체성을 이어오다가 2011년 혁신에 방점을 둔 ‘지구를 혁신하다’로 바뀐다.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이노베이션=혁신’을 강조해오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1996년 6월 “2차전지 사업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며 “그동안 축적된 자기코팅 기술을 바탕으로 최근 사업개발팀을 새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2년 뒤 고용량 리튬이온 배터리를 독자 개발하는 데 이른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휴대폰, 노트북, PC, 캠코더 등 다양한 전자기기에 사용된다. 당시 SK는 “리튬이온 전지 제조기술의 핵심은 코팅과 조립기술로써 SK는 20년간 비디오테이프 제조를 통해 축적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SK이노베이션은 2012년 세계 최초로 양극재를 구성하는 니켈-코발트-망간 비율이 각각 60%, 20%, 20%로 배합한 NCM622 양극재 배터리를 개발하고 2014년 양산에 성공했다. 이후 이보다 진화한 NCM811 양극재를 적용한 배터리를 2016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2018년부터 양산 중이다. 2019년에는 ‘NCM구반반’ 양극재를 적용한 배터리 개발에 성공해 2022년 양산을 계획 중이다. 양극재는 배터리의 힘과 주행거리를 좌우하는 핵심 기술이다. 이처럼 SK이노베이션이 기술 개발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에너지의 미래를 폭넓게 본 덕분이다.

◆배터리 세계 6위까지 단숨에 올라
최근 배터리업계의 뜨거운 감자는 전기차용 배터리다. SK이노베이션은 2006년 9월20일 자체 개발한 하이브리드 자동차용 배터리(중대형 리튬이온 배터리)를 미국에서 실제 차량에 탑재해 시험 가동에 성공했다. 빠른 기술성장은 2009년 글로벌 시장으로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됐다. 그해 10월 독일 다임러그룹의 계열인 미쓰비시 후소와 중·대형 하이브리드 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성과를 바탕으로 2010년 국내에서도 현대차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그해 9월 전기차 전용 리튬이온폴리머 배터리가 장착된 한국의 첫 고속전기차 ‘블루온’에 SK의 배터리가 장착됐다.
SK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도 글로벌 배터리 기업이 되는 원동력이었다. 2011년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술혁신연구원을 방문해 전기차 배터리 사업 의지를 표명했다. 최 회장은 “모든 자동차가 SK 배터리로 달리는 그날까지 배터리 사업은 계속 달린다. 나도 같이 달리겠다”며 지원을 약속했다.

SK이노베이션은 2013년 중국 베이징자동차그룹 및 베이징전공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해외 생산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기아 쏘울 전기차(EV)에 배터리를 공급했다. 2016년에는 그동안 자회사 등에 납품했던 것을 메르세데스-벤츠가 출시할 전기차에 배터리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SK이노베이션은 세계 배터리 기업 순위 20위권 밖에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기술과 영업력으로 2018년 세계 배터리 시장 16위(점유율 0.8%)로 단번에 도약했다. 이후 2019년 점유율을 배로 늘리며 10위권에 진입했다. 시장의 후발주자로 분류됐지만 그동안 쌓아온 내공은 뒷심을 발휘했다. 지난해는 시장 점유율 5.4%로 세계 6위까지 올라오는 저력을 보였다. 여기에는 증설을 마친 서산공장(4.7GWh)과 2019년 말 준공된 중국(7.5GWh)과 헝가리(7.5GWh) 공장 등의 생산량이 한몫했다. 지난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부문 성장률은 239%로 10위권 내 배터리 기업 가운데 가장 높았다.
투자업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올해 SK이노베이션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매수로 상향했다. 그 근거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 상승세, 배터리사업가치 재평가, 소송리스크 해소 예상, 글로벌 OEM 추가 수주 기대감 등을 꼽았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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