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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잠에서 깨어난 가시연꽃, 월성 왕궁 복원 숨 불어넣다 [S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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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0-25 16:00:00 수정 : 2023-12-10 15: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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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치 품고 부활한 문화유산
적 침입 막으려 성곽 따라 파놓은 해자
물 속 흙서 70여종 씨앗·열매 채취
신라 고위층 향유 조경문화 복원 나서

5년 전 화협옹주 묘선 화장용기 출토
‘피부 관리 효과’ 황개미 성분 등 확인
전통유산 스토리 입혀 브랜드화 박차

1600여년 전 신라 왕궁 월성의 어느 여름날. 성을 따라 파놓은 해자에는 가시연꽃이 가득하다. 줄기와 잎을 덮고 있는 가시는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 본연의 기능에 부응하듯 강인한 외형이고, 짙은 자색의 꽃에는 월성에 사는 이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위엄이 엿보인다. 해자와 땅을 경계 짓는 목제구조물과 환삼덩굴, 쑥, 명아주 등의 키 작은 풀들로 덮인 초지를 지나면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뤘다. 더위를 식히는 살랑바람에도 꽃가루가 피어올라 해자의 수면으로 조용히 떨어진다. 지금의 경주 여름 풍경을 참고로 대충 때려 맞춘 멀고 먼 옛날의 그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해자, 목제구조물, 초지와 숲으로 이어지는 짜임새가 분명하고 가시연꽃, 환삼덩굴, 느티나무 등 풍경 속 출연자가 구체적이지 않은가. 해자 속으로 가라앉아 펄 속에 갇힌 뒤 1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씨앗과 꽃가루를 분석해 얻은 근거 있는 묘사다.

줄기와 잎을 덮은 가시, 자주색의 꽃이 특징인 가시연꽃

시간이 지워버린 먼 옛날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까. 티끌만 한 흔적을 파고들어 뼈대를 만들어 살을 붙이고, 끝내는 되살리고 있다. 단순한 부활을 넘어 ‘과거가 낳은 미래 가치’로 발전할 것이란 기대도 받는다.

월성 해자 속 씨앗과 꽃가루는 역사를 품은 풍경화로 발전했고 이제는 신라 경관의 실제 복원을 꿈꿀 정도에 이르렀다. 268년 전에 죽은 조선 공주의 무덤에서 나온 가루, 액체는 시장 출시를 앞둔 화장품으로 변모했다.

◆가시연꽃, 1600년 전 신라 왕성의 경관 포인트

가시연꽃이 시작이었다. 201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정밀발굴에 착수하고, “해자엔 가시연꽃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의 씨앗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듬해부터 해자를 덮고 있는 흙 전부를 물체질해 그 안의 목제유물과 씨앗, 동물뼈 등의 수집에 나섰다.

이런 방식으로 확보한 꽃가루, 70여종의 씨앗과 열매를 기초로 연구한 결과를 종합하면 월성 주변 경관은 멀리서부터 나무 군락, 풀로 뒤덮인 나대지, 해자와 땅을 경계 지은 목제구조물, 해자의 순으로 이어진다. 느티·느릅나무류가 군락을 이뤘고, 나대지에는 명아주, 환삼덩굴 등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 목제구조물은 해자 수심에 맞춰 흙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이런 역할만 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긴 것도 있어 방어용 시설이기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성벽을 따라 땅을 파고 물을 채운 해자에는 수생식물이 다양하게 자랐지만 주인공은 단연 가시연꽃이었다. 지금까지 씨앗 2만여개가 확인된 이 식물은 줄기, 크게는 2m까지 자라는 잎을 덮은 가시가 특징이다. 현재는 멸종위기종으로 관리되고 있는 창녕의 우포늪이 군락지로 유명하다. 연구소가 그려낸 5세기경 월성 해자의 여름 풍경화는 이 같은 조사결과를 종합한 것이다.

가시연꽃이 당시 신라인들의 각별한 선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은 흥미로운 추론을 낳는다.

경주 월성 해자에서 발굴된 가시연꽃 씨앗

고대국가에서 성 주변에 설치한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기본적인 기능이다. 5세기 무렵은 전쟁이 잦았던 시기라 이 외의 다른 역할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특정 식물의 존재감이 이 정도로 뚜렷하다면 어떤 목적에 따라 의도적, 지속적으로 관리되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경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냐는 해석이 나온다. 연구소 최문정 학예연구사는 “5∼6세기의 해자는 전쟁이 많았던 시기의 것인 만큼 방어용으로만 간주하는 해석이 대부분이었다”며 “그러나 가시연꽃의 출토 양상을 보면 조경적인 면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또 다른 흥미로운 추론으로 이어진다. 실물이 많지 않아 고고학에서는 연구대상이 되는 경우가 드문 색깔과 관련된 것이다. 연구소 안소현 박사의 해석은 이렇다.

“문헌을 보면 계급별로 사용할 수 있는 색을 나눴던 신라 사회에서 자주색은 최고위층이 향유하는 색깔이었다. 최고위층이 살았던 왕성의 해자에 자주색의 가시연꽃이 많이 피었다는 점이 재밌는 매칭을 이루는 것 같다. 꽃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지난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화장품을 분석하고, 현대적 기술로 재현한 화장품을 관계자들이 선보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K뷰티 진흥 기대받는 조선 공주의 화장품

2015년 발굴된 영조의 일곱 번째 딸 화협옹주(1733∼1752)의 묘에서 묘지석과 빗, 먹, 청동거울과 함께 화장용기가 출토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화장용기 12건에 담긴 당대 화장품의 흔적이었다. 갈색의 고체, 투명 액체, 흰색과 빨간색 가루 등은 긴 세월 묻혀 있었던 만큼 상태가 나빴으나 당대 최상위 계층의 여성이 사용한 화장품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임에는 분명했다.

분석 결과 화장품에는 수은이나 납 등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적지 않았다. 액체에서는 황개미 수천 마리를 갈아넣은 게 확인됐다. 유독 성분의 존재는 당시 과학적 지식의 부족을 보여주지만 황개미 활용은 “개미의 성분이 여드름 등 피부 관리에 효과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계급질서의 정점에 섰던 여성인 화협옹주가 쓴 화장품의 효과는 어느 정도였을까. 단순 비교에 무리가 있지만 지금의 화장품보다 효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명백하다. 한국전통대 정용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사용감이 거칠었고, 일부는 피부를 화사하게 해주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지속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평가됐다.

효과는 떨어지고, 전승 단절로 재현도 쉽지 않은 화협옹주의 그것은 새로운 화장품 개발의 단초가 되어 관련 제품이 시장 출시를 앞두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한국전통문화대, 코스맥스가 손잡고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을 기반으로 제조한 신제품을 지난달 말 공개했고, 올해 말 시장 출시를 목표로 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무덤 속 찌꺼기일 뿐인 걸 어렵게 되살리고, 상품의 출발점으로 만든 건 문화유산이 가진 미래 가치를 구현한 또 다른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 교수는 “화협옹주의 화장품을 고고유물로서만 남겨두지 않고 미래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이라며 “관련된 조사를 확대해 기능적으로 우수한 전통 재료를 확보할 수 있다면 K뷰티의 진흥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은 조선의 공주가 사용했던 화장품이란 ‘스토리’가 차별화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코스맥스 이준배 부장은 “한국 화장품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선진국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화장문화’라는 측면에서는 경쟁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전통 화장문화를 발굴함으로써 문화라는 가치를 신제품에 접목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경주=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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