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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의 달인’ 시골 소년, 시의원 선거서 ‘3無’ 신화 첫 장

입력 : 2020-09-13 19:18:48 수정 : 2020-09-13 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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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포스트 아베’ 스가, 누구인가
고향마을 사람들 “다툼 중재 잘해”… 2남2녀 중 셋째·장남으로 태어나
父 기초의원 해당 정의원 4선 지내… 취업했다 중의원 비서로 정치 입문
1996년 국회行, 고향선 축하 불꽃… 2002년 아베와 北문제로 의기투합
日 역대 최장 관방장관 재임 주목… 자민당 7개 파벌 중 5개 지지 얻어
일본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에 출마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지난 9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청년ㆍ여성국 주최 토론회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도쿄=AFP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를 거쳐 오는 16일 임시국회에서 제99대 총리에 정식으로 선출될 예정이다. 세계일보는 일본의 정권 교체기를 맞아 스가 장관 인물과 스가 시대의 한·일 관계 등 대외 관계, 내각·당직 개편 등 일본 정계의 변화를 정리한다.

 

차기 일본 총리가 확실시되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고향은 일본 북부의 오지 아키타현 유자와시 산간부 아키노미야의 후미진 시골이다.

 

도쿄역에서 주요 구간을 시속 200㎞ 이상으로 질주하는 아키타신칸센에 탑승 후 610km 떨어진 아키타현 오마가리역에서 객차 2량짜리 지역 열차로 갈아탄 뒤 다시 70㎞를 더 가야 가장 가까운 요코보리역에 도착한다. 역무원이 1명뿐인 이 작은 역에서도 소년 스가가 친구들과 낚시를 하곤 했다는 야쿠나이강과 나란히 있는 108번 국도를 따라 15㎞ 정도 산 쪽으로 더 들어가면 협곡 사이의 작은 마을이 나온다. 1970년대 개축했다는 하얀색 2층짜리 생가 현관은 꽉 닫힌 채 부친의 이름 ‘스가 와사부로(菅和三郞)’ 문패만이 빈집을 지키고 있다.

 

◆아키타현 출신 ‘무3반’의 신화

 

“눈이 많이 내리는 아키타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농가를 잇고 싶지 않아 취직을 위해 도쿄로 왔습니다.”

중학교 학예회 때 연극 장발장에서 경찰관 연기를 하는 모습.(가운데) 이토 에이지 제공

스가 장관은 지난 2일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선언 때 ‘다타키아게’(叩上) 스토리를 강조했다. 다타키아게는 밑바닥부터 온갖 고초를 겪고 올라와 제 몫을 하게 된 사람을 뜻한다. 이후 주간문춘이 스가 장관 집안이 빈농이 아니라 딸기 농사로 부농이었고, 집단취직(형편이 어려운 농촌 일정 지역의 중·고교 졸업자가 특정 기업에 한꺼번이 취업하는 형태)이나 야간 대학 고학의 미담도 ‘페이크(Fake)’라고 보도했다.

 

동네에 있던 초·중학교에서부터 2시간 통학 거리에 있던 고교까지 동기생인 이토 에이지(74)는 13일 부농·빈농 논란에 대해 “메센(目線·보는 눈)의 차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가난하면 요시히데가 부자라고 생각했고, 부자면 그가 가난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어 “중학교 동기 150명 중 학비를 낼 수 있는 30여명만 고교에 진학했다. 누나 둘도 대학을 나왔으니 몹시 가난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상경 배경에 대해 “집안에 논이 1정보(약 9917㎡·3000평) 있었는데 요시히데는 2정보가 있으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으나 1정보로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아주 부유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스가 장관 홈페이지에는 농가의 장남으로 가업을 돕다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어 1967년 고교 졸업 후 가출처럼 상경했다고 적혀 있다. 스가 장관은 대학 야간학부를 졸업했다는 과거 일본 매체 보도에 대해 다른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고학으로 어려워 학교 측에 한때 야간 전과 의사를 밝힌 바 있다고 바로잡은 것도 확인된다.

1967년 아키타현립 유자와고교 제19회 졸업생 앨범 속의 스가 요시히데 장관(원). 앨범 촬영
아키타현 공보지 ‘아키타’ 1971년 12월호에 게재된 아키노미야딸기생산출하조합장 시절의 부친 스가 와사부로. ‘아키타’ 촬영

스가 장관은 부친 스가 와사부로(2010년 92세 사망)와 교사였던 모친 다쓰(98) 사이에서 2남2녀 중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주철도에서 근무했던 부친은 1945년 패전 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귀향했고, 1948년 장남이 태어났다. 부친은 1950년대 후반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해 딸기생산출하조합을 만들고, 스가 장관 고교 1학년 때 기초의원에 해당하는 정(町)의원(4선)에 당선한 동네 유지였다.

 

폐간된 현(縣) 공보지 ‘아키타’에는 부친과 조합에 관한 기사가 3건(1971년 12월호, 75년 7월호, 78년 8월호) 나온다. 1971년 12월호 기사에 따르면 조합원 140명인 조합은 전년(1970년) 20㏊(20만㎡)에서 1200만엔의 소득을 올렸다. 1971년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그해 평균 환율로 계산하면 71만3433만엔이 된다. 1200만엔을 이 금액과 비교하면 상당해 보이지만 조합원(140명) 평균으로 나누면 8만4500엔 정도 되는 금액이다. 1975년 7월호에 ‘궤도에 오른 지연출하 딸기’라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보면 조합의 안정적 운영도 스가 장관의 상경 후인 1970년대 중반 이후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키노미야중학교 야구부 시절(뒷줄 맨오른쪽). 이토 에이지 제공

◆“조정의 대가, 한·일관계도 정리했으면”

 

고향 사람들이 소년 스가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야구, 스모 등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신망이 높고 인간관계가 좋아 친구끼리 다툼이 생기면 중재역을 했다는 것이다. 라면 가게를 운영하는 후지와라 히로후미(74)는 “야구 시합 중 아웃, 세이프가 헷갈리면 같이 경기하던 스가씨에게 물었다”며 “스가씨가 아웃이라면 아웃이고, 세이프라면 세이프였다”고 말했다.

 

스가 장관은 고교 졸업 후 가업을 이으라는 부친의 권유를 뒤로한 채 “도쿄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도쿄행을 택했다. 상경 후 골판지 공장에 취직해 일하다가 시야를 넓히기 위해 사립대학 중 학비가 가장 쌌던 호세이대에 진학했다. 도쿄 쓰키지 농수산물도매시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민간기업에 취직했다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정치다. 인생을 걸고 싶다”는 마음에 대학 동문 선배 추천으로 1975년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중의원(하원) 의원(통상산업상·건설상 역임) 비서로 입문해 11년간 있었다.

지난 11일 일본 아키타현 유자와시 아키노미야에서 관광객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생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정면의 흰색 2층짜리 집이 스가 장관 생가다. 유자와=김청중 특파원

1987년 요코하마 시의원 선거에서의 당선이 인생의 전기가 됐다. 이때부터 2·3세 정치인이 판치는 정계에서 ‘무(無)3반’의 신화가 시작됐다. 3반이란 지반(地盤·지반), 간판(看板·간반), 가방(가반)의 마지막 일본어 발음에서 따온 말로 차례로 지역조직, 지명도, 정치자금을 말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좌우명도 이때 생겼다.

 

생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비닐하우스 옆에는 ‘스가가대대지묘(菅家代代之墓)’라 묘비가 있는 납골묘가 있다. 묘비의 뒷면에는 ‘헤이세이 원년(1989년) 스가 와사부로·다쓰, 요코하마시의원 스가 요시히데 세움’이라고 적혀 있다. 카리스마 넘치던 부친도 이때쯤엔 가업을 뿌리치고 집 떠났던 장남을 인정했을 것이다. 이 묘에 부친도 모셨다. 인근 오가치스포츠센터의 스가 요시노리 매니저는 “올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오본(御盆·양력 8월15일 일본 추석)을 즈음해 묘를 참배하는 스가 장관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6년엔 국회에 진출했다. 고향 하늘엔 축하 불꽃이 터졌다. 당선 후 고향에 내려온 스가 장관에게 친구가 앞으로 총리를 목표로 하라고 했다. 초선 의원 스가는 “국회 초선 동기 50명 중에 총리가 한명 나올까 말까 한다”고 겸손히 답했다고 한다.

무명이었던 스가 장관은 200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북한, 납북자 문제를 고리로 의기투합해 이후 행동을 같이한다. 2006년 9월 아베 총리의 1차 집권 때 요직인 총무상을 맡았다. 아베 총리가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으로 사임한 뒤 다시 총리에 도전할 때 그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의 2차 집권 이후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으로 재임했다. 내각 넘버 2에게 집중된 정보력과 인사권을 이용해 언론을 통제하고 관료 사회에서 알아서 긴다는 손타쿠(忖度)를 유도했다는 점은 오명이다.

 

스가 장관이 조정의 대가임을 강조했던 동창생 이토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 나라랑 사이좋으면 좋겠다. 요시히데가 일본의 대표가 되면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잘 정리할 것으로 기대한다.”

 

유자와시 아키노미야=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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