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부터 대본까지 직접 써 30분짜리 짧은 작품 인정받아… 국립오페라단 무대 올라 영광
현실선 외면받는 클래식 음악… 댓글·마녀사냥 등 익숙한 소재로 대중들에게 좀더 다가가려 노력”

“질서를 깨트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사라져야 해. 마음을 뺏긴다면 너도 빨간 구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을걸. 잘라라! 잘라라! 잘라라! 잘라라!”
무채색 도시 가운데서 미친 듯 빨간춤을 추는 소녀 카렌을 향해 사람들은 손가락질한다. 카렌의 아버지 목사는 이 모습을 한탄과 절망으로 바라보다 과거 업보를 짊어지고 딸과 함께 춤을 춘다.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5일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온라인으로만 초연을 선보인 창작 오페라 ‘레드슈즈’의 강렬한 마지막 장면이다. 소녀가 주문 걸린 빨간 구두를 신고 계속 춤을 추다 결국 발을 잘라낸다는 안데르센 잔혹 동화 ‘빨간 구두’를 새롭게 만들었다. 욕망을 경계하는 단순한 내용이 댓글 문화와 마녀사냥 등 질서와 저항, 단일성과 다양성이 공존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과 그 속에서 휘둘리며 살아야 하는 주인공들 삶의 이야기로 진화했다. 뛰어난 연출과 빼어난 무대가 가사 전달력을 극대화시킨 노래, 음악과 어울리며 창작 오페라의 힘을 보여줬다.
‘레드슈즈’ 창작자는 35세 작곡가 전예은이다. 작곡은 물론 대본까지 직접 썼다. 오페라 세계에선 드문 일인데 과정도 남다르다. 유망 예술가 육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30분짜리 짧은 작품이 가능성을 인정받아 몇 단계 과정을 거쳐 국립오페라단 무대에 오르게 됐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아직 젊은 나이에 주어진 큰 기회에 대한 감사함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음악을 공부해왔지만, ‘오페라’는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져 완성되는 ‘총체적 예술’인 만큼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작곡가의 경험과 연륜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안데르센 동화를 목사와 카렌, 그리고 목사에게 배신당한 여인 마담 슈즈가 펼치는 욕망과 복수의 드라마로 현대화한 이유에 대해 전예은은 “창작 오페라가 대중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원작을 그대로 오페라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와 연결해 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고 동화 속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카렌은 저주 받은 구두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추지 않으려 하는 것이며, 목사 또한 자신을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된 몸부림을 보여 줍니다. 이제껏 감춰 올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억제됐던 욕망의 몸짓이며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몸짓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전예은은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국내 활동 중이다. 서울시향 ‘아르스노바’ 위촉 작곡가로 활동하며 주요 음악제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내년에는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위촉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클래식계가 기대를 거는 신예인데, 음악가 길을 걷기로 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한다. 그것도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음악이 준 감동이 길잡이가 됐다.
“우연히 보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음악 때문에 극 분위기가 극대화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야기에 음악을 입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작곡가라는 꿈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오선지 위에 단단한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작곡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사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살아있는’ 클래식 작곡가는 이미 불멸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들과 경쟁해서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처럼 한국에서 ‘살아있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어려움에 대해 전예은은 “힘든 건 맞는데 좋아지고는 있다”면서도 “클래식 음악이 가요 등과 비교했을 때 점점 더 외면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현실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어요. 작곡가들이 ‘조금만 더…’ 하면서 안간힘을 쓰는 건 사명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발버둥이라도 치고 노력해야지 단 한 명, 단 한 곡이라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무대에서 연주가 되는 작곡가와 곡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다 같이 발버둥 치는 것 같아요. 실제 진은숙 선생님 같은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깐요.”
작곡을 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전예은은 두려움 끝에 상상 속 아이디어가 음악으로 구현되는 희열을 되새김하듯 말한다. “한없이 개인적인, 그리고 매우 외로운 작업입니다. 매번 곡을 시작하며 마주하는 빈 오선지는 그 무엇보다 두렵게 느껴고요. 하지만 제가 상상하던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써 내려가며 조금씩 구현되어 나갈 때 느끼는 희열이 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그 희열은 더더욱 극대화되죠. 제가 상상하던 것이 음표로 나열되고, 또 그것이 소리를 얻어 음악으로 구현되는 과정이 꽤 매력적이고 중독적이어서 계속 작곡을 하게 됩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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