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부동산 거래 등에 인감증명서 요구
대리발급 가능… 사기 등 범죄 악용도 많아
정부, 2012년 대체수단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도입
위임 안되고 홍보 부족… 발급 비율 미미

◆일제 잔재 ‘인감’… 불편하고 위조·도용 위험 높아
23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인감은 ‘자기 자신의 도장이라고 사전에 신고해 공증을 받은 도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국가에 ‘내 도장’을 등록시켜 놓은 것으로, 부동산이나 금융 거래에서 인감을 요구하는 것은 ‘이 거래를 한 당사자가 계약자 본인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인감은 일제의 잔재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일본은 식민통치 수단으로 인감제도를 강제 도입했다. 높은 문맹률도 제도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현재는 서명이 보편화하고 일상에서 도장을 쓸 일이 많지 않은 만큼 도장을 매개로 한 본인 증명 제도는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과거 유럽 등에서도 도장을 많이 사용했지만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점차 쓰이지 않게 됐다. 현재 인감을 쓰는 국가는 일본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 한국뿐이다. 심지어 일본조차 비효율적이라며 최근 인감을 줄이는 내용의 행정업무 온라인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인감을 생각했을 때 ‘불편’이란 단어를 함께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직장인 박모(44)씨도 얼마 전 인감때문에 고생을 했다. 경기도에 거주하던 박씨는 직장 문제로 1년간 가족들과 떨어져 부산에서 지내게 됐는데, 중고차를 구매하려고 하자 업체에서 인감을 요구했다. 아내에게 연락해 도장을 찾아봤지만 10여년간 사용한 적이 없어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새로 도장을 파 인감을 변경하려고 했더니 본인의 주소지에서만 가능했다. 결국 경기도의 집까지 다녀왔다. 박씨는 “신분증이 있고 내가 업체를 방문한 것인데도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작은 도장뿐이란 상황이 황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본인이 가도 인감이 없으면 거래를 못하는데 타인이 내 인감과 인감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면 나 대신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꼬집었다.

박씨처럼 많은 이들이 본인의 인감이 어떤 도장인지 잊거나 어디있는지 몰라 찾는 데 애를 먹곤 한다. 인감을 새로 등록하거나 변경하려면 반드시 본인의 주소지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해야하는 것도 불편한 점으로 꼽힌다. 소요되는 행정비용도 크다. 지방행정연구원이 인감제도 개편을 위해 2011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감대장 보관과 관리 등에 필요한 인적·물적 비용은 매년 94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가장 큰 문제는 범죄에 쓰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인감은 법적 효력이 커 타인이 인감을 가지고 있을 경우 몰래 대출을 받거나 땅·집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감증명서는 대리 발급도 가능해 매년 인감을 위조·도용해 벌어지는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여자친구가 맡긴 인감증명서를 이용해 여자친구가 소유 중이던 편의점 운영권을 자신에게 옮기려고 한 남성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중고차 매매 계약을 위해 제출한 인감증명서를 중고차 판매인이 훔쳐가 대출계약을 맺은 사례도 적발됐다.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도입했지만 사용 미미
정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2009년 대체수단을 마련한 뒤 인감제도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인감증명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2012년 인감의 대체수단인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 도입됐다.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본인이 서명했다’는 사실을 행정기관이 확인해주는 제도로, 인감증명서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인감처럼 도장을 지참하거나 사전에 등록할 필요가 없고, 전국 읍·면·동 주민센터에 방문해 서명하면 바로 발급된다. 본인만 발급받을 수 있고, 발급 시 용도를 기재하기 때문에 위·변조 가능성도 낮다.

그러나 사용률은 인감증명서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행안부에 따르면 지난해 발급된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212만6189건으로, 인감증명서(3557만454건)의 6% 수준이었다. 인감증명서 대비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 비율은 2015년 3.7%에서 2016년 5.6%로 소폭 올랐으나 이후 2017년 6.2%, 2018년 5.8% 등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 인감제도보다 불편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인감증명서 발급은 위임할 수 있지만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본인만 발급받을 수 있어 고령자나 장애인 등의 대리 발급이 불가능하다. 또 문맹자는 서명이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사례여서 절대 다수가 인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원인으로 돌리기 곤란하다.
◆관행처럼 쓰이는 인감… 공공기관부터 사용 줄여야
인감 사용을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행’에 익숙해져서다. 은행이나 부동산 등 수요 기관에서 관행대로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비효율적인 제도가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부동산 계약을 한 이모(39)씨는 주민센터에서 “본인서명사실확인서도 인감과 효력이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챙겨갔지만 부동산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부동산 업자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는 잘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할 수 없이 인감증명서를 떼느라 주민센터를 또 찾아야했다. 서울의 한 주민센터 공무원은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홍보하라는 지침이 있지만 민원인에게 설명해줘도 민원인들이 ‘인감증명서를 떼오라는 말만 들었다’며 인감증명서를 떼간다”면서 “수요기관에서 본인서명사실확인서도 된다고 적극 안내해야 사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지난 6월 충남 공주시의 인감증명서 발급 대비 본인사실확인서 발급 비율은 34.3%로 전국 평균(5.7%)의 6배 수준을 기록했다. 공주시는 이·통장회의, 반상회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집중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홍보가 새 제도 정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과거 인감제도 폐지를 검토했으나 사회에서 많이 쓰고 있어 바로 폐지하기가 어려워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수요 기관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인감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요 기관이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많이 사용하도록 홍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부터 인감보다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 위주로 요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창호 지방의정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인감제도는 결국 폐지로 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고 위조 가능성이 있어 완벽한 본인 확인 시스템이 아니다”며 “도로명주소를 도입했지만 지번 주소도 병기하듯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공기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요구하면 민간도 따라가게 될 것”이라며 “사적 거래에서 공증제도를 보다 원활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감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다각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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